민족시인 이육사, '일제 저항 詩' 창작 무대 포항 주목
민족시인 이육사, '일제 저항 詩' 창작 무대 포항 주목
  • 곽성일 기자
  • 승인 2019년 08월 18일 20시 4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19일 월요일
  •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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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여름 방문해 '해조사'·'질투의 반군성' 등 작품 직필
도진순 교수 "청포도의 '내 고장' 포항 포함하는 조국 뜻해"
이육사 청포도 시비

올해 광복 74주년을 맞아 민족시인 이육사의 ‘청포도’를 비롯한 대표적 일제 저항시 창작무대가 경북 포항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포항이 이육사의 시 창작혼을 불러일으킨 곳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항일 투사로 일제에 저항한 이육사 시인의 대표 시 ‘청포도’의 창작 무대가 포항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는 가운데 이육사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시의 상당 부분을 포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독립운동으로 여러 번 체포돼 투옥된 경험이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칼과 펜을 함께 잡은 당시에도 보기 드물었던 유형의 독립운동가였다

이육사와 백범 등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포항에 와서 송도해수욕장과 인근 포도농장 등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 시 ‘청포도’와 ‘해조사’,‘노정기’,‘질투의 반군성’등의 작품을 창작했다"고 밝혔다.

도진순 교수는 "1936년 7월 30일 육사가 석초에게 보낸 엽서에 의하면, 그의 동선은 서울~대구~경주~불국사~포항이다. 즉 당시 이미 경주·포항지역에는 협궤의 경편철도(朝鮮輕便鐵道)가 있었다. 육사도 이 철도를 이용해 경주에 1박하고 다시 포항으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포항방문은 처음으로 추정됨)

이렇게 포항에 와서 ‘기차[철도]’와 ‘솔밭’이 인근에 있는 포도밭’을 보았다. 그러니까 ‘청포도’의 ‘내 고장’은 육사가 나고 자란 원촌 ‘고향’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포항을 포함하는 더 넓은 공간 즉 조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육사가 ‘청포도’의 시상을 얻은 장소는 포항 동해면 도구리의 미쯔와포도원(三輪葡萄園)이라고 알려졌다.

육사는 1936년 7월 30일 포항에 와서 송도원에 머물던 1936년 8월에는 1908년 기상관측 이래 최장 장마와 최강의 태풍을 만났다.

육사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송도원 바다에, 그것도 밤에 뛰어나갔다 육사는 이 특이한 경험을 이듬해 발표한 그의 명수필 ‘질투의 반군성(叛軍城)’(1937년 3월)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나갔습니다. 가시넝쿨에 엎어지락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들린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 비치더군요.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 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동해 바다에서 태풍에 맞섰던 육사는 이듬해 바다와 태풍을 묘사한 시를 연달아 발표했다. 먼저 ‘자오선’(1937년 12월)에 발표된 ‘노정기’. 여기서 육사는 서해바다를 밀항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던 젊은 시절을 태풍과 싸우던 것으로 노래했다. 

 포항을 다녀간 이후 1937~38년 육사의 시와 수필은 태풍에 맞서 걸어 모두 이러한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소설 ‘황엽전’(1937년10월~11월)에는 절망적 고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존재의 모습이 여러 군데 묘사돼 있다. 

이육사는 1904년 출생, 1944년 사망한 광야 시인으로 그에게는 ‘지사’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키스트’ ‘의열단 단원’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존재한다. 이육사가 된 것은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수감됐을 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였기 때문. 그는 이를 ‘대륙의 역사’라고 해 육사로 바꾸었다. 

1933년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육사는 앞서 1925년 20대 초반에 형제들과 함께 항일 의열 투쟁 단체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펜을 잡기 전에 항일 무장 독립 투쟁에 뜻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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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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