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르시시즘(自己愛)이 예술창작의 동력(動力)을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언어표현예술인 문학에서도 작가의 나르시시즘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르시시즘은 문예적 창작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미학적 수준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유치한 글(작품)이 되고, 그것을 적절히 다룰 수 있으면 아름다운 글(작품)이 됩니다. 제 잘난 맛이 없이는 자기표현도 없겠습니다만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한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다. 남을 잘 웃기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자기는 잘 웃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먼 산 보며 에둘러 말해야만 독자들의 귀가 열립니다. 엄살이나 과시는 오히려 독자들의 불신의 장벽만 높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품들은 심사자에게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일 뿐입니다.

크게 보면,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본성에 속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 없이는 그 어떤 생명체도 생명을 유지, 존속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1차적 자기애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2차적 자기애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됩니다. 심리학에서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신의 생명(존재)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닥치면 생명체는 자기애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모든 표현예술은 ‘상처받은 자들의 자기 존재증명’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자기 존재증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상처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공한 예술가들은 자기 상처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적인 공인을 받게 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사로잡힌’ 상태에서 ‘어루만지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발견을 향한 꾸준한 절차탁마의 소산입니다. 오로지 천재들만 강 저쪽에서 태어납니다.

인간을 이루는 부품은 본디 조악(粗惡)합니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도 그렇습니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정말이지 한 줌의 흙먼지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미물(微物)스러운 것들이 홀로 제 몫을 다하고, 혹은 서로 연결되어,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창달하는 것을 보면 그저 신통방통일 뿐입니다. 부품은 조악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 한계를 훌쩍훌쩍 뛰어넘는 완제품(역사적 인간)들을 볼 때면 경탄을 넘어 불가사의한 느낌마저 듭니다. 생명의 신비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그 모든 ‘경탄할 만한’ 인간 존재 역시 그나마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잘난 맛이 없이는 어떤 넘어섬(자기초월)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부(自負)와 수치(羞恥)라는 나르시시즘의 양대 기둥이 있었기에 종합(분열을 넘어서는)으로서의 초월도 가능했을 거라고 여깁니다.

한일(韓日)간의 역사분쟁, 경제 분쟁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합니다. 누가 상처에 사로잡혀 있고 누가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지, 누구의 나르시시즘이 자부와 수치를 아는 것인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상처에 사로잡힌 자에게 지지 않는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너나없이 분투해야 할 때입니다. 자기발견을 향한 꾸준한 절차탁마가 긴요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상대의 상처가 아물기 힘든 것일수록(유일한 원폭피해국), 그들의 2차적 자기애가 유난히 별난 것일수록(천황제라는 政體) 우리의 피와 땀, 노력과 인내, 어른스러움도 그만큼 더 요구됩니다. 멀리 보고, 동족애(同族愛)를 바탕으로 거국적으로 힘을 모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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