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 입고 돌아온 해방 혁명가 귀한 손님 맞이할 기쁨의 노래

포항 호미곶에 위치한 이육사 청포도 시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청포도’는 이렇게 ‘내 고장 7월’로 시작한다. ‘7월’이란 시간은 육사의 인생에서 몇 번 중요한 계기로 등장한다. 그가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난징 시내에 체류하던 시기 ‘시경’의 ‘빈풍칠월(빈風七月)’이란 시가 새겨져 있는 인장을 구입했다. 그해 ‘7월’ 15일 샹하이에서 귀국하기 직전 열린 ‘최후의 만찬’에서, 육사는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그 귀중한 인장을 혁명 동지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에게 주었다. 이후 ‘빈풍칠월’인장은 3년 선배이자 혁명 동지인 윤세주의 분투와 무강을 기원하는 징표가 됐다. 그리고 1936년 8월 한 달 육사는 포항 바닷가 체류하는데, 음력으로는 7월도 해당한다.

△‘청포 입은 손님’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시 ‘청포도’는 이 구절에서 ‘청포도’에서 ‘청포(靑袍)’로 돌연 전환된다. 바로 이 순간, ‘하늘 밑 푸른 바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듯 가슴을 여는 순간, ‘곱게 밀려서 오는 ’‘흰 돛단배’를 타고, 내가 바라던 손님이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1936년 8월 ‘질투의 반군성’에서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그 순간과 같은 계열이다.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흰 돛단배를 타고 오는 손님은 ‘청포(靑袍)’를 입고 온다고 했다. 그간 ‘청포’를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으로 입던 푸른 도포’ 즉 관복 또는 고급 예복으로 해석해 ‘너무 사치스럽고 투쟁 없는 기다림’으로 평하거나, 앞 구절의 ‘고달픈 몸’과 어울리지 않아 ‘납득되지 않는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런데 ‘청포도’의 청포는 관복 또는 고급 예복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이다. ‘청포도’의 ‘청포’는 두보(杜甫)가 안록산(安祿山) 등 반역자를 규탄하는 용어로 사용한 ‘청포백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육사는, 두보가 부정적인 반란가로 표현한 이 ‘청포백마’를 긍정적인 혁명가의 이미지로 전환했다. 이것은 ‘역사를 새로이 쓰겠다’는 육사의 혁명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필자는 ‘청포도’에서 등장하는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육사의 절친한 혁명동지 윤세주(尹世胄)로 비정한 바 있다. 1938년 윤세주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육사와 같이 부르짖던 슬로건처럼 중한합작으로 조국해방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했고, 1939년 1월 육사는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오는 윤세주 같은 해외의 혁명가를 맞이할 향연을 준비하자고 노래했다.



△‘바다와 포도, 그리고 철도’

시 ‘청포도’는 육사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육사 고향 안동시 도산면 원촌에는 1993년에 세운 ‘청포도 시비’가 있고, 이육사문학관 바깥에는 ‘청포도 샘’이, 문학관에서 육사 묘에 이르는 2.8km의 ‘청포도 오솔길’이 구비돼 있다. 그러나, 육사 고향 원촌에는 일제 강점기는 물론 지금도 청포도가 없다. 육사 스스로 친구 C군에게 자신이 ‘풋된 어린 시절’ 포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아는 바와 같이 내 나이가 열 살쯤 되었을 때는 그 환경이 그대와는 달랐다는 것은, 그대는...줄포푸라가 선 신작로를 달음질치면 우선 마차가 지나가고, 소구루마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고, 봇짐장수가 지나가고, 미역 뜯어 가는 할머니가 지나가고, 며루치(멸치) 덤장이 지나가고, 채전 밭가에 널린 그물이 지나가고, 솔밭이 지나가고, 포도밭이 지나가고, 산모퉁이가 지나가고, 모랫벌이 지나가고, 소금 냄새 나는 바람이 지나가고, 그러면 너는 들숨도 날숨도 막혀서 바닷가에 매여 있는 배에 가 누워서 하늘 위에 유유히 떠가는 흰구름 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다가 팔에 힘이 돌면 목숨 한정껏 배를 저어 거친 물결을 넘어가지 않았나? 그렇지마는 나는 그 풋된 시절을 너와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지금 생각하면 남양(南洋)토인(土人)들이 고도의 문명인들과 사귀는 폭도 됨직하리라.(‘연보’1941.6)’



여기서 묘사된 C군의 고향은 누가 봐도 동해 바닷가 풍경이다. 또한 포도밭과 바다 그리고 배가 등장해 마치 시 ‘청포도’의 현장을 묘사한 듯하다. 당시 포도는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고도의 문명인’인 C군은 어린 시절 볼 수 있었지만, ‘남양토인’과 같은 촌사람인 육사는 볼 수 없는 과일이었다. 그것은 포도주라는 근대 문명과 결합되는 새롭고 귀중한 것이었다.

1936년 7월 30일 육사가 석초에게 보낸 엽서에 의하면, 그의 동선은 서울-대구-경주-불국사-포항이다. 즉 당시 이미 경주 포항지역에는 협궤의 경편철도(朝鮮輕便鐵道)가 있었다. 육사도 이 철도를 이용해 경주에 1박하고, 포항으로 왔다. 이렇게 포항에 와서 “기차(철도)”와 “솔밭”이 인근에 있는 포도밭”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청포도’의 ‘내 고장’은 육사가 나고 자란 원촌 ‘고향’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포항을 포함하는 더 넓은 공간 즉 조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육사도 ‘청포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도 끝장난다.’



△‘청포도와 풋포도’

‘청포도’관련 전국의 모든 기념시설은 청포도를 품종으로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청포도’는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미래의 손님을 위한 향연(5~6연)을 위해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을 노래한 시이다. 향연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시에서 ‘청포도’는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이고, 향연에 등장하는 ‘이 포도’는 이것이 익은 검붉은 포도가 되어야 ‘하이얀 모시수건’가 잘 대비되고, 시가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 즉 ‘7월’의 푸른 ‘풋포도’가 익어 가면서,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8월 중순 이후 잘 익은 검붉은 포도가 되었을 때, 고달픈 몸으로 오는 지친 귀한 손님을 위한 향연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다.
 

포항 호미곶 청포도시비.

△‘호미곶의 청포도 시비를 찾아서’

포항의 문학가들과 유지들은 육사가 ‘청포도’의 시상을 얻은 장소는 포항 동해면 도구리의 미쯔와포도원(三輪葡萄園)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34년 당시 미쯔와포도원은 면적이 60만평(200정보)에 달하는 대규모의 포도농장이었으나, 지금은 해병부대 영내로 들어가 일부는 골프장으로 일부는 군 시설로 변했다.

포항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 위치한 청포도 시비

대신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 ‘청포도 시비’가 있으며, 일월동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이 있다. 이곳의 청포도는 검붉게 익어가는 포도일까? 문학공원에는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심어져 있다.

포항 호미곶 청포도시비 뒷면에 새겨진 이육사 연보.

2017년 2월 8일 아침, 나는 동해면의 시비와 문학공원을 보고 난 이후 호미곶의 ‘청포도 시비’를 찾아 나섰다. 시비를 보는 순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는 시비가 또 어디에 있을까? 감탄했다.

주변에서 ‘파도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햇살이 비칠 때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을 보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포항 호미곶에 위치한 이육사 연보비.

1999년 포항시와 한국문인협회 포항 지부에서 세운 시비 뒷면에 적힌 내용에는 사소한 착오도 없지 않다. 육사가 포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37년’이 아니라 1년전인 1936년 7월 29일이며, 이듬해 경주 남산 삼불암에서 머물렀던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그 바다, 그 시비를 잊을 수 없다. ‘호미곶 해맞이광장’ ,‘상생의 손’ ‘연오랑세오녀상’은 널리 홍보돼 있지만, 이 ‘청포도 시비’는 한적하게 숨어 있다. 호미곶에 오는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게 잘 안내했으면 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