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9주년 특집, 이재원 경북생명의숲 고문 연재
전통 숲, 현대 도시공원의 '교과서' 역할
숲 내 생활문화 깃들어야 치유기능 가져

포항 흥해서부초등학교 인근 숲과 논의 풍경.

“숲은 문화이고 위안이다.”
숲은 단순히 나무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훨씬 더 큰, 그 이상이 되는 셈이다.

숲은 나무들이 모여서 공간적인 기능이 생긴다. 일터이자 놀이터가 되고 휴식터가 된다.이야깃거리가 생기고 때론 종교적인 기능까지 하게 된다. 숲은 문화이고 문화 또한 숲에서 싹튼다.

긴 역사를 통해 보면 숲은 늘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사람이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 했을 때 자연은 바로 숲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근현대를 겪으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고 급기야 숲을 훼손하고 숲을 멀리하게 됐다. 전에 없던 많은 도시문제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숲에서 떠나자 인간성이 황폐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도심에 공원이 새로이 조성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숲의 치유의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무들의 집합체가 숲이 아니듯 나무 몇 그루 심는다고 공원이 치유의 기능을 가지기엔 부족한 점이 있다. 바로 생활문화가 깃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전통숲은 오늘날 조성하는 도시공원(숲)의 교과서이자 원형이다. 우리가 사라져 가는 마을숲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경북의 숲’연재를 시작한다.
 

흥해 북천수.

포항 흥해에는 신광 용연저수지에서 칠포로 흐르는, 흔히 곡강천이라 불리는 하천이 있다. 이 하천을 끼고 신광 방면으로 가는 신작로를 따라가다 보면 좌우로 인접한 북송리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북천수’는 바로 북송리의 마을숲을 일컫는 말이다.

마을숲은 자연재해나 액운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됐고, 마을주민에게 건강한 기운을 북돋기 위해 특별한 관리와 보호를 받았다. 그래서 마을숲은 마을 한복판이나 마을과 잇닿은 거리에 들어서게 된다. 큰 산의 깊고 울창한 숲이 아니라 사람 곁에 있는 숲이다.

북송리 또한 여느 마을숲처럼 대문 밖이 숲이고, 담 너머 나무가 있는 곳이다. 멀리 있어 가기 힘든 곳이 아니라 삶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 마을숲이라는 것을 여기 소나무숲을 걸으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흥해 북천수.

여름의 북천수는 시원하다. 찌를 듯이 달려드는 열기와 빛을 막아주는 나무들이 있기에 마을숲은 동네 주민에게 충분히 쉴 공간을 내준다.

정비가 잘 된 편안한 산책로와 함께 인근 흥해서부초등학교 학생들이 이곳을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천수에는 적어도 50년에서 100년 된, 혈통 좋은 소나무들이 제법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예로부터 흥해는 넓은 들판을 지닌 곳이지만 여름철에는 곡강천이 자주 범람해 홍수 피해가 컸던 모양이다. 사실 흥해를 가르는 하천은 북천과 남천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곡강천이라 부르는 것이 북천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조선 철종 때 흥해 군수였던 이득강은 ‘읍성과 흥해의 진산인 도음산의 맥을 보호하고 흥해의 상습적인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북천에 둑을 쌓아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흥해 모든 장정을 모아 제방을 쌓게 했고 이를 ‘북천방’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매산리, 북송리, 마산리에 이르는 북천방에 소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200여 년 전 주민 안위를 위해 혜안을 발휘한 이득강 군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가 세워졌는데, 현재 이 공적비는 흥해 영일민속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북천수는 이때 조성된 숲 일부가 남아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제작된 흥해현지도. 북천수(北川藪 )라 표기돼 있으며 빼곡히 심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 마을숲의 유래나 기원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은데 비교적 북천수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와 1938년 조사인 ‘조선의 임수’ 등에 그 기록이 남아 있어 역사적 유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지금도 북천수 규모는 여느 마을숲에 비해 크기가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의 모습은 대단했으리라 짐작된다.
 

군수 이득강 북천수 유적비

이득강 군수 이후 지홍관이라는 군수 때에도 추가로 나무를 심어 폭 400m, 길이 4㎞에 달하는 거대한 숲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수탈을 겪는 동안 이곳의 아름드리 노송은 선박용 목재로 벌목이 됐고, 개인 경작지를 늘리면서 숲을 훼손하게 된 부분도 있다.

현재 나무들의 상당수는 광복 직후에 새로 심은 게 많다. 예전보다 그 규모는 줄었지만 북천수는 여전히 마을 가까이, 사람 사는 동네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 숲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축제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북송리 마을로 묶인 큰마을, 건너각단, 양촌 마을 등의 주민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곳에 모여 동제를 지냈고, 건너각단 마을 앞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건너각단 마을에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마을 앞산이 ‘불 화(火)’ 자의 형상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나니 이에 대한 방책으로 앞산의 화기를 눌러야 한다고 했단다.

포항 흥해서부초등학교 인근 숲과 학교 전경.
포항 흥해서부초등학교 아픔다운 숲 전국대회 제 1회 공존상 수상.
포항 흥해서부초등학교 아픔다운 숲 전국대회 제 1회 공존상 수상.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은 산 정상에 소금물을 묻고 매년 이 간수가 마르지 않도록 살폈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저녁에 달집태우기를 한 후 지난해 묻어 두었던 간수병을 파내어 다시 간수를 채우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렇듯 전통마을숲은 그저 바라보는 숲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의 생활터전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 숲으로 알려진 이곳은 2006년 3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천연기념물 제468호로 지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숲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포항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마을숲을 더 알리고, 잘 가꾸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계속 찾게 된다.

글·사진 이재원 경북생명의숲 고문
글·사진 이재원 경북생명의숲 고문

최근에 다시 찾은 북천수에는 ‘흥해 국도7호선 우회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북천수의 동쪽 끝자락을 남북으로 도로가 가로질러 지나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개발과 보존. 과연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할 것인가. 200년 전 나무를 심고 고을의 기운을 보호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가짐에서 그 답을 찾을 순 없을까. 개인적으로 이러한 마을숲이 앞으로는 우리에게 중요한 생태적 자산과 지역 유산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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