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가 세상을 떠난 뒤 며느리가 시어머니 유품을 정리했다. 시어머니 장롱 속에 이력서가 한 보따리 들어 있었다. 장롱 속의 이력서들은 모두 아들에게 전달되기를 소망했던 인사청탁물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이력서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아들에게 단 한 통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 이력서 중에는 한국전쟁 때 학살당한 자신의 남편 시신을 찾아 염을 해주고 장례도 치러주는 등 가장 잃은 가정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은인이 보내온 이력서도 있었다. 그 이력서마저 인사문제에 철두철미한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아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 위기로 치닫던 경제를 안정화 시켜 대한민국 건국 이래 대통령으로부터 유일하게 ‘경제대통령’ 호칭을 들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일화다. 전두환 정권 시절 김재익의 위상은 문재인 정권의 조국 못지않은 만큼 막강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스스로 자제했고, 어떤 형태의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로부터의 신뢰는 김재익을 지키기 위해 12·12 동지였던 허화평과 허삼수를 내칠 정도로 두터웠다.

그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것에 행복을 느꼈고, 북한의 아웅산테러로 숨지기 전까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권력 자체에 눈독을 들인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순수했고,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독과 수모 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고려대 백완기 명예교수의 김재익에 대한 인물평이다.

김재익의 가장 강한 힘은 순수함에 있었다. 순수했기 때문에 강한 추진력을 펼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김재익이 사심을 가지고 저런 주장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믿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신뢰가 김재익의 가장 막강한 파워였다. 대통령의 최 측근으로 4년 가까이 일했지만 단 한 번도 돈이나 정직과 관련,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다.

“자식에겐 멋지게 사는 법과 사랑을 물려주면 족하지 재산을 물려줘선 안 된다”고 가르친 김재익의 생활철학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였다. 불법 비리 의혹으로 온 나라를 분노로 들끓게 하고 있는 조국 전 민정수석은 김재익의 처세를 왜 못 배웠나.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