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며칠 전 미술관을 다녀왔다. 남달리 미술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가끔은 찾는 편이다. 이번엔 평소와는 좀 다른 특별한 이유로 미술관을 찾았다.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아 포항시립미술관이 준비한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순히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라는 게 주된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번 특별전 제목인 ‘제로(ZERO)’가 무엇보다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게 서양미술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유럽의 고전화가들이다. 유명화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가 고전미술 화가들의 주된 무대였음을 모르는 이 없다. 그만큼 유럽은 오랫동안 세계역사와 서양미술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역사의 중심은 폐허가 된 유럽이 아닌 미국으로 옮겨갔고 서양미술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50년대 당시 미국의 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가 굉장한 관심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화가가 잭슨 폴락이라는 화가였는데, 그는 대형 캔버스를 걸어 다니며 물감을 흩뿌리는 일명 ‘액션페인팅’으로 유명세를 탔다.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미술행위이지만 당시로써는 엄청난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그런 독특한 미술 방식의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기존 미술해석 문법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행위의 주체인 작가만이 이해할 뿐이었다. 여기에 반발해 일어난 운동이 바로 ‘제로(ZERO)’운동이었다.

우리는 일이 꼬이거나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될 때 흔히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5,60년대 서양미술계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지극히 작가의 개인적 감정이 실린 추상적 표현과 상업미술이 횡횡하던 당시의 미술계 풍토에 대한 비판의식이 독일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리얼리즘과 주관성을 배척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색채나 작가의 주관적 감정 그리고 개인적 표현을 거부하는 대신, 재료, 선, 면 그리고 형태 등과 같은 기본적 미적 요소들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원점에서 주관성 대신 미술의 순수성을 새롭게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제로운동’의 핵심이었다. 숫자 ‘0(ZERO)’은 잃어버린 미술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작가들의 새로운 시작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로운동’은 비록 2차 대전 후 서양미술계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운동의 본질, 즉 순수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크다. 특히,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역사문제로 꼬여버린 이웃 나라와의 외교관계는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원점에서부터 재정립이 필요해 보이고, 양보와 타협 대신 감정적 극한대결만을 일삼는 우리 정치는 막스 베버가 말한 정치인의 책임윤리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무분별한 각종 가짜 정보가 넘쳐나고 정제되지 않은 기사들이 앞다퉈 확대 재생산되는 지금의 여론 환경은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순수에서 한참 동 떨어져 가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어쩌면 ‘제로운동’이 아닐까 싶다.

‘제로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설립된 제로파운데이션의 창립자 귄터 위커는 과거 한 전시행사를 통해 ‘미술관은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모토로 이벤트를 연 적이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 현실이 떠오른 걸 보니 그의 말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터전이 될 수도 있는 미술관이 우리 가까이 있어 정말이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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