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천 아름드리 나무로 이룬 숲…태곳적 신비함 고스란히

포항 죽장 매현마을숲.
포항시 죽장면 가사리 가사재에서 발원해 서남쪽으로 흘러 죽장면 소재지 부근에서 자호천과 만나는 가사천(佳士川)은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가장 맑은 물 중 한곳이다.

물이 맑아서일까. 40리에 달하는 가사천을 따라 위치한 죽장면 매현리와 입암리 일대는 포항에서는 물론 경북에서도 풍광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옛날 여헌 장현광 선생(1554~1637)도 이곳의 경치에 반해 아예 터전을 잡지 않았던가.

입암리라는 지명을 풀어보면 설립(立)자에 바위암(巖)자니까 ‘선바위’가 된다.

가사천 계곡에는 높이 20m의 ‘선바위’가 높이 솟아있는데 그 옆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를 쌓고 ‘일제당’이라는 팔작지붕 건물이 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그의 벗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일제당과 선바위.
영천에 계시던 노계 박인로 선생도 자호천을 거슬러 올라와 여헌 선생을 뵈러 일제당을 찾았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노계 선생 또한 일제당 주변 가사천의 풍광에 매료돼 ‘입암별곡’, ‘입암’29수 등을 남기셨다.

포항 죽장면 입암서원 강당 전경.
일제당 건너에는 입암서원이 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을 비롯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 네 분을 배향하고 있다.

이들 네 분은 흔히 ‘입암사우(立巖四友)’로 불리는 분들로, 청송에 계시던 여헌 선생을 죽장면 입암리로 모시고 온 분들이다.

“천공이 유의하셔 사우께 깃치시니 (하느님이 뜻이 있어 사우께 끼치시니)일반 화산으로 여헌을 청하신대 (반쯤 꽃핀 화산으로 여헌을 청하시니)”

입암사우 네분이 여헌을 모신 이야기를 노계 선생은 ‘입암별곡’에 이렇게 남겼다.
포항 임압서원 앞에 자리한 노계 박인로 시비.
임압서원은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손됐다가 오늘날 남아있는 건물은 1913년에 복원됐다.

입암서원을 지나 가사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물가 가까이에 오래된 나무들로 어우러진 숲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매현 마을숲이다.

물가 가까이 큰 나무들이 있어서 경치도 좋지만 큰 나무들의 그늘이 물가에까지 드리워져 여름 물놀이 장소로는 안성맞춤이다.

매현(梅峴)은 우리말로 ‘산 고개’라는 뜻의 묏재, 멧재, 밋재 등으로 불렸던 발음을 살려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 앞에는 병암산이 있고 매현1리(아랫뫼재 마을)에는 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모여 살았을, 이곳이 꽤 오래된 삶의 연고지임을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매현 마을숲에는 숲 중앙에 큰 느티나무가 당산나무로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의 오래된 내력을 말해준다.

느티나무는 우리 민족의 마을 신앙이나 식물자원에서 중심에 있는 나무이다. 느티의 어원이 느티나무가 지닌 신성(神性)의 어떤 징조라는 뜻의 ‘늦’과 수목 형상이 위로 솟구친다는 뜻인 ‘티’가 어우러진 한글 말이라 한다.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생해온 고유종으로 자연스레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근처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고, 나무의 재질이 단단해 여러 가지 도구의 재료목으로 사용돼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최고급의 목재로 느티나무를 이용했다고 한다.

흔히, 느티나무의 생장 주기와 그 모습은 삶의 방식과 비유가 된다. 느티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은 너그럽고 느긋하며, 때론 늠름하다 할 수 있다.

느티나무 아래는 사람이 쉴 수 있는 커다란 그늘을 제공하며, 그로 인해 이 공간은 서두를 것 없는 느림의 시간과 공간을 선사한다.

그리고 자연과 삶이 어우러져 하나의 종교적 삶을 시작하게 된 고대서부터 우리와 함께해온 나무이다.

하늘 높이 뻗은 매현마을숲 내 당산나무가 햇살 속 신령스러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매현리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는 흔히 다른 곳에서 보는 느티나무보다 곧고 높게 자란 수형이 특징이다. 가사천을 건너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룬 숲과 어울려 태고적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 수백 년 벗겨져왔을 나무껍질은 그 자체로 연륜이고 굵은 나무 몸통에 둘러쳐진 금줄과 더불어 신령스러움이 가득하다.

요즈음 마을 신앙의 의미는 흐릿해졌지만 여기 매현리 당산숲은 여전히 마을주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느티나무 노거수에 곱게 매단 금줄이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의 마을 신앙에서 장승이나 솟대, 탑 등은 마을을 위하는 조형물을 인공적으로 만든 후 받들게 되는데, 당산나무는 있는 그대로의 나무를 모시는 경우로 그 신앙적 형태가 가장 원초적인 대상물로 여겨진다.
매현숲 안에 있는 당산나무.
매현리 마을주민은 이 당산숲을 깨끗이 정성스럽게 다듬고 챙긴다. 마을에서는 원래 정월 보름과 칠월 보름인 백중 날에 당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칠월 보름날에 당제와 함께 풍농을 기원했던 천제를 합쳐 일 년에 한 번 동제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은 이곳에 참배한 후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떠나는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마을 자치회에서 선출한 제관은 당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숲을 청소하고 이곳에 금줄을 친 뒤 제관 이외에는 숲 출입을 막았다.

만약 제관 외에 다른 사람이 출입하면 동티, 즉 마을의 규율을 어긴 사람은 탈이 난다고 한다. 이 마을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당제를 부실하게 지낸 제관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 겁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대개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당산나무에 깃든 영험함과 신령을 표현하는 이야기로 오랜 세월 당산나무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조상의 지혜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한동네 사람이든 외지 사람이든 당산나무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면 벌을 받는다는 종교적인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노거수를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입암리와 매현숲 일대 풍광의 아름다움 뒤에는 잊어서는 안 될 슬픈 역사가 있다.

바로 구한말 의병이야기이다. 문경새재의 이남지역을 ‘산남’이라 해 영남지역의 의병부대를 ‘산남의진’이라 한다. 산남의진은 영천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조직했다. 다른 의진은 대장 당대에서 끝났다고 하면 산남의진은 3대에 걸쳐 대장을 이어가며 1906년부터 무려 5년간 활동을 하였는데, 창의소는 영천시 자양면 검단동(현재의 충효동)에 두었지만 죽장면 일대가 당시 의병항쟁의 주요 격전지였다.

1907년 10월 7일 입암리에서 전투가 있었다. 비록 해산된 군인들이 합류함으로써 보강은 됐다고 하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만 뭉친 유림 선비들과 산간포수들이 주된 구성원이었던 의병에 맞선 일본군은 의병 토벌대 정예 병력이었다. 전투경험이나 화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입암리에 쉬고 있던 일본군을 먼저 기습한 것은 우리 의병이었다. 기습 총소리에 매현리에 남아있던 본진도 가세했고 일본군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오판한 의병들은 입암서원 앞 주막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으며 방심하고 있었다. 오전 0시가 넘어서 일본군은 주막에 있던 의병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 날 전투로 정용기 대장을 비롯 40여명의 의병들이 허무하게 전사했다.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 주막은 입암서원에서 1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지금도 흐르는 입암서원 앞 가사천 냇가에는 ‘입암’을 노래한 노계 박인로 시비가 있다. 이재원 경북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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