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요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날이 갈수록 대립과 반목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무리 한반도 상황이 특수한 상태라지만 냉전체제가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사회에선 좌·우 사상대립이 첨예하다. 게다가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정치이념 논쟁은 합리적 대안 없는 정파 간 갈등만으로 국민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또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뼈아픈 과거 역사문제에서조차 진실을 외면한 채 친일이니 반일로 분열하는가 하면, 장관직 인선을 두고는 정당 간 사활을 건 끝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우리 사회는 왜 매번 대결 국면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항시 극단적인 대립 상태만 이어가는 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자성어 중에 ‘비인부전(非人不傳), 부재승덕(不才勝德)’이라는 말이 있다. 그 옛날 서성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서, 뜻인즉 ‘인성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벼슬이나 비장의 기술을 전하지 말고, 한갓 재주로 덕을 이기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 됨됨이가 덜된 사람이 벼슬이나 기술을 가질 경우, 그 지위나 재주를 이용해 사적이익을 우선 도모할 것은 불 보듯 뻔하고, 머리 좋은 것만 믿고 설쳐대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내부분열만 일으킬 것이기에 이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데 있어 너무도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학벌사회는 공부머리 좋다는 이유만으로 명문대 입학은 물론이고 성적이 곧 능력임을 자랑하듯 각종 시험을 통해 모든 사회분야 요직에 진출, 특권적 지위를 집단적으로 독점해 온 결과다. 이렇게 독점지위를 누리며 소위 금수저 집단을 형성한 상위계층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계급문화를 서로 공유하며 계층 간 불평등을 계속해서 대물림시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렇듯 특권을 누려온 이들이 정치권력마저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부족 탓에 시민으로부터 위임된 정치권력에 대한 참 이해가 부족한 이들에게 정치인 지위가 주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지금의 한국정치 현실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성직자이자 철학자인 니콜라스 쿠자누스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감성’, ‘이성’ 그리고 ‘지성’ 등 세 가지로 구분해 설명했다. 각각의 개별인상들은 ‘감성’을 통해 전달되지만 ‘이성’의 힘은 비교와 대조를 통해 각각의 대립물을 구분 내지는 분리 시킨다. 그리고 ‘지성’은 구분 혹은 분리된 대립물을 일치시키는 능력이다. 따라서 그는 ‘대립의 합치’를 이루려는 ‘지성’이야말로 인간 정신능력의 최상위에 있고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원천인 신, 즉 절대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봤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성직자인 그가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인간이 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사회적 통합을 이야기할 때도 매우 유용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쿠자누스는 당시 대립과 반목만을 일삼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교황의 외교사절로 종교 일치와 평화 합의를 위해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우리 국민들은 이런 ‘지성’능력을 지니고 있다. 국론이 분열되어 극한의 대립으로 치달을 때마다 어김없이 국민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되어 왔음을 우리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것이 선거를 통해서든, 집회를 통해서든 국민의 집단지성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집단지성을 아전인수 격으로 왜곡하는 일단의 정치무리들이 늘 존재해 왔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사회가 ‘대립의 합치’를 통해 통합과 화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는 인성이 덜 된 자들에게 정치적 힘을 쥐어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현명한 집단지성이 다시금 요구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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