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곤 경북독립운동관장 "재조명 통해 역사의 정의 바로세워야"

2019 종가포럼에 종손·종부 등 800여 명이 참석해 종가의 사회적 가치를 재조명 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리는 경북지역 종가들의 활약상이 재조명되며,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경북지역 주요 종가들이 가문을 보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뒤로 한 채 국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희생을 치러서라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종가 곳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24일 오후 경북도청 동락관에서는 근·현대를 지나온 종가의 전통을 다룬 ‘2019 종가포럼’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 각지의 종가 대표자들이 참석했으며, 경북과 경기지역의 명가 후손을 소개하는 고서와 고문서, 유물자료 50여 점도 함께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이날 학술강연에서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관장은 “종가는 보수성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사회문제 해결보다는 종가보전에 무게를 두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지만 독립운동사에서의 종가의 활약과 기여를 통해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오늘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가 쇠락해지거나 망해버린 종가를 찾아 역사를 복원하고 제대로 평가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바른길”이라고 주장했다.
 

2019 종가 포럼 전시행사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종가의 자료 50여 점이 선보였다.

다음은 김희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장의 학술강연 요약.

△ 종가 독립운동의 역사와 활동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는 3.1 운동을 분기점으로 51년(전반기 25년·후반기 26년)의 역사를 가진다.

안동에서는 학봉종가 김흥락이 안동의병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정재종가 류지호·류연박 부자, 삼산종가 류창식, 주촌종가 이긍연 등이 안동의병에 참가해 대표적인 종가 인물로 기록돼 있다. 또 온계종가의 이인화, 노송정종가 이찬화가 선성의병장을 맡아 저항을 이어갔고 영양에서는 호은종가의 조승기가 거병하고 영해에서 존재종가 이수악이 영해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돕다가 소실을 입은 종가도 있다. 퇴계종가는 1896년과 1907년 두 차례 불이나 끝내 모두 타버렸고 문중에서 힘을 합쳐 1926년과 1929년에서야 종택을 새로 세울 수 있었다. 또 1896년 온혜의 온계종가도 공격을 받아 소실됐고 학봉종가도 관군의 응징을 받았다.

△임청각 이상룡 문중의 활약

1904년 이후 중기의병과 1907년 8월 이후 후기 의병에 들고 계몽운동의 시기가 시작되면서 경북 종가의 참여는 뜸해졌다.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종가는 있지만 계몽운동에는 종가 특성상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임청각의 이상룡이 거창 가조면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거금을 투자한 것은 드문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1910년 이상룡은 “국가가 무너진 마당에 종가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를 만들었다. 1913년에는 임청각을 매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다급한 현실에 부딪혔고 부녀자들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가며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아이들을 길렀다.
 

오회당 남상룡 태극기(안동군 임동면 3.1만세운동 시 제작)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25년 3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에서 면직돼 탄핵당하자, 2대 대통령이 된 박은식은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했고 이후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이 추대됐다. 1925년 상해로 가서 반년 동안 노력했지만 이미 고령이 된 그는 쇠락해진 임시정부를 되살리는 데 한계를 보였다.

영천 매산종가의 정원흥은 광복 직전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붙잡혀 고문을 받은 끝에 순국한 인물이다. 20대 일본 유학길에 올라 30대에 임시정부와 연결된 뒤 1944년 대구 동촌비행장 폭파 계획을 세우다가 붙잡혔다. 그의 활동은 광복 전야에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한 귀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정목 기자
이정목 기자 mok@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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