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무협 이야기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그 시절 무협(武俠)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불패의 해결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족주의(家族主義)입니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각축장, 강호(江湖)의 온갖 힘센 세력들도 이 가족주의와 만나면 여지없이 패퇴합니다. 위협받는 가족(최소 공동체)과 그것을 지키려는 무협의 활약, 그리고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거대한 악의 몰락, 무협 이야기는 크게 보면 그렇게 압축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으로, ‘가족’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바로 무협 세계의 본류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숱한 무협소설과 무협영화들이 그렇게 ‘가족의 승리’를 증언합니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무협영화의 효시는 아무래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장철·1967)일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도장(道場·확대 가족)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한 팔을 잃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좌절을 겪던 주인공은 그러나 기연(奇緣)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또 무공비급을 얻어 한 팔만을 쓰는 검법의 고수가 됩니다. 그러던 중 도장이 위기에 처하게 되고 주인공은 과거의 사적인 원한관계를 뛰어넘어 위험을 무릅쓰고 대의를 실현하는 ‘의리의 사나이’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 앞에 무협 속의 가족주의는 그 뒤 약간의 부침을 겪습니다. <동방불패>, <동사서독>, <황비홍>, <와호장룡>, <영웅> 등으로 넘어오면서 새 세대 영화감독들은 가족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주제를 무협극에 접목시키려 노력합니다. 역사나 심리가 영화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장르영화로서의 본색을 잃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속에 역사나 심리가 들어오면 선과 악의 구별이 명료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무협은 본디 권선징악의 단순한 이분법 위에서 독자(관객)들에게 해방(解放)과 보상(報償)의 위로(慰勞)를 제공해 왔습니다. 그러나 서사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위로예술로서의 역할에 태만해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무협영화가 현란한 내러티브를 동원해 과장된 시공간(강호)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하는 고급화의 길을 걸었을 때 돌아온 것은 관객들의 외면이었습니다. “무엇이 중한데?”라는 영화 <곡성>의 대사가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나온 무협영화 중에서 <검우강호>(오우삼·2010)와 <무협>(진가신·2011)이 가족주의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동방불패> 이후 잠시 유예되었던 ‘가족의 승리’를 다시 전면에 내걸고 있습니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가족의 구성과 유지’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곡절 많고 사연 많은 이들의 행복한 가정은 예기치 않은 큰 도전에 직면합니다. 애써 얻은 가족의 평온이 위협받고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적들은 가족의 중함을 모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든 가족 따위는 해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가족은 오직 인질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입니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주인공을 겁박합니다. <검우강호>와 <무협>에서도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집니다. 주인공은 거대한 악과 이중의 사투를 벌입니다. 인질로 잡힌 가족도 구해야 하고 적들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우여곡절을 겪기는 합니다만 결국은 주인공이 승리합니다. 하늘이 돕기도 하고(<무협>), 적들의 자중지란이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검우강호>). 가족을 인질로 잡고 야비한 폭력을 쓰는 자들은, 혹은 타고난 흑도의 무리거나 혹은 권력에 찌든 내시 집단이거나 혹은 돈만 아는 자객들이거나 반드시 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죄목은 불패의 사랑, 가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천복(天福)이라는 걸 그들은 모릅니다. 한 번 죽어봐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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