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실현하기 위한 1% 가능성만 있다면, 항상 창의적인 생각과 노력으로 도전해야

이향백 대한민국 금속재생산 명장이 연주기 앞에서 작업 현황을 체크하고 있다.
“직장에서 편하게 일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겠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꿈은 대학에서 생활에서 만나는 의문들을 연구하고, 그 결과물 도출을 통해 후진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전달해 주는 연구자가 꿈이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배고픈 나라였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기에 자신의 꿈을 찾아가기엔 현실이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철강산업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운명을 탓하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1%의 가능성만 있어도 기꺼이 뛰어들어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반평생을 철강 주조에 바쳐왔던 그는 2013년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금속재생산 명장 이향백(포스코 포항제철소 제강부 2연주공장 과장)이다.



△ 고향 경주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철강인생의 시작.

그는 지난 1961년 경주에서 태어났지만 모두가 어렵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가신 부모님과 떨어져 조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때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가게 된 그는 경남공고로 진학하면서 기술인의 길로 들어섰고, 고교 3학년 시절 인생의 첫 기로에 섰다.

어릴 적부터 궁금증이 많았고, 궁금증이 생기면 어떻게든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그는 대학에 진학해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충남대학교에 응시했지만 실패하면서 철강인으로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대학 실패와 함께 부산공업전문대학(현 부경대)으로 진학한 금속에 대한 남다른 궁금증이 생겼고, 결국 전문대를 졸업한 뒤 지난 1986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하면서 철강인생이 시작됐다.

특히 포스코 입사 후 처음으로 보직을 받은 제강부 연속주조가 34년 철강인생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로 다가오고 있다.

△1%의 가능성에 도전해 온 34년 연속주조 철강인생.

제철산업은 크게 용광로 내에서 철광석을 환원시켜 철을 추출하는 제선→쇳물속에 녹아있는 탄소를 필요량만큼 제거하는 제강→제강과정을 거친 쇳물을 일정 형태로 응고시켜 반제품인 슬라브·블룸·빌렛을 만드는 연속주조→슬라브를 대형압연기로 눌러 다양한 형태의 판재류나 선재류로 만드는 압연 과정으로 나눠 진다.

그중 연속주조는 작업자가 1500~1600℃ 가량의 쇳물을 직접 맞닥뜨려야 하는 데다 365일 쉬지 않고 쇳물을 부어 슬라브를 만들기에 제철산업 과정 중 가장 위험하면서도 힘들면서도 근무하기 힘든 작업과정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향백 명장은 그런 연속주조공정에서 평생을 바쳤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슬라브는 수 m에서 수십 m에 이르는 두꺼운 직사각형 형태의 모양인 데다 반제품이어서 특별한 치장도 없이 압연공정으로 보내지거나 외부 다른 2차 철강회사로 보내져 크게 눈길을 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슬라브야말로 1600℃에 이르는 쇳물을 끊임없이 주형에 부어가며 응고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포스코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다.

쇳물을 주형에 부은 뒤 1차 냉각과정에서 표면이 균일하게 응고되지 않을 경우 고온 상태인 내부 쇳물이 2차 냉각대에서 외부로 분출, 제품 불량은 물론 분출된 쇳물이 주변 설비까지 튀어 인명사고 위험은 물론 조업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주공장은 포스코가 쇳물을 쏟아낸 이후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연구와 개선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향백 명장은 이런 열악한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작업과정에서의 안전성 확보와 품질개선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가 갖고 있는 침지노즐 홀딩장치 특허는 평생 동안 연속주조과정에 바쳐온 열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다.

침지노즐이란 용광로에서 생산된 쇳물을 담은 래들(대형 쇳물도가니)에서 일정량의 쇳물을 받아 연속주조공정에 공급해주는 설비인 턴디쉬에서 주형으로 쇳물을 공급 할 때 Guide 해주는 장치로, 연속주조작업 종료 시 쇳물 유출을 막기 위해 침지노즐은 절단치구에 의해 절단돼 제거된다.

이때 절단된 침지노즐이 주형 내로 떨어지면 굳지 않은 쇳물에 떨어져 폭발을 유발하거나 떨어진 침지노즐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고온의 열에 의해 작업자가 화상을 입는 등 재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조업 터러블(Trouble) 발생의 경우 복구 작업에 긴 시간이 소요돼 생산성 향상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향백 명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려 3년에 걸쳐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 연구를 하는 한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노력 끝에 마침내 제거된 침지노즐이 주형 내로 떨어지지 않고 잡아내 제거할 수 있는 홀딩장치를 개발, 특허까지 받았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좀처럼 대안을 찾지 못해 고민하면서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회의감에 젖은 적도 많았지만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1%의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마음을 다져 잡은 끝에 작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향백 금속 재생산 명장이 운전실 데스크 앞에서 조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끊임없는 연구 그리고 대한민국 명장의 길.

포스코 입사 후 34년간 연속주조 외길을 걸어온 이 명장은 단 하루도 그냥 보낸 날이 없었다.

‘답은 현장에 있으며,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론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 나섰고,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더 많은 연구와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그런 열정은 결국 현장에 근무하면서 대학원까지 진학해 현장에서 얻은 노하우와 학문적 이론을 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금소재련기술사·제강 및 제선 기능장·금속재료기사기계정비산업기사·소방설기기사·주몰조형기능사·열처리기능사는 물론 실기교원 자격증까지 갖게 됐다.

여기에 침지노즐 홀딩장치를 비롯한 2건의 특허와 3건의 실용신안권을 비롯 금속조직 관련 2건의 철강관련 논문발표와 교육교재 개발 등 이루 셀 수 없는 업적들을 만들어 왔다.

‘세상에 그저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하는 그의 손을 보면 평생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기술사 시험을 준비할 때는 무려 70여 자루의 볼펜이 닳아 없어지도록 공부를 하다 보니 지금도 그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는 두툼한 굳은살이 박혀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 명장은 회사 선배인 기계정비분야 대한민국 명장인 김영식 명장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끝에 2013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이 명장은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된 뒤 스스로에게 ‘내 스펙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라고 묻고 또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의 답은 ‘후배들과 철강기술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지난날을 돌아봤다.

이런 답을 내린 이 명장은 산업현장교수나 포스코 사내대학 등에 나설 때면 한층 더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교육현장에 나가보면 ‘나도 대한민국 명장이 되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을 가진 젊은 청년들의 눈망울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제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다그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청년들에게 “매뉴얼에 얽매인 기술인이 아니라 늘 새로운 도전과 자발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기술이 돼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퇴직을 앞두고 느끼게 행복, 그리고 또 다른 꿈.

지난 1986년 포스코에 입사한 취미이자 특기가 연속주조였던 그는 퇴직을 1년여 앞두고 있는 요즘 행복의 의미를 찾았다.

그의 포스코 34년을 돌아보면 일과가 끝나면 현장의 문제점 개선이나 궁금한 현상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와 공부뿐이었다. 틈이 나면 현장 문제점을 둘러보고,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까 만을 고심하다 보니 남들처럼 취미생활도 하지 못했고, 가족들에게까지도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인으로부터 ‘당시는 쇠랑 결혼하지 왜 나랑 결혼했냐’는 타박도 숱하게 들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될 때쯤 딸이 결혼해서 분가를 하고, 아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외지로 떠나면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저녁을 먹은 뒤 부인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일이었다.

“함께 걷다 보면 각시가 참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평생을 쇠에 미쳐 살아온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많았던 모양입니다”라는 그는 “그래도 요즘 둘이 손잡고 걸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때 ‘이것이 인생이구나’라는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가 살아온 인생 동안 체득한 노하우를 담은 책을 만드는 것과 한국폴리텍대학과 같은 기능인 양성소에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것이야말로 평생을 바쳐온 포스코와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며 새로운 꿈을 그렸다.

이종욱 기자
이종욱 기자 ljw714@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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