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금상

유병수作

비백서 병풍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이 그 앞에서 우뚝우뚝 걸음을 멈춘다. 병풍에 쓰인 비백서 묵흔이 특별하다. 표현은 소박하나, 내면의 추상성은 무궁하여, 그것이 그들의 옷소매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하다. 나도 그들 틈에서 점과 선, 구성과 비례에 따른 공간미에 빠져든다.

비백이란 날아오를 듯한 필세를 비飛라 하고, 실 같이 피어나는 곳을 백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먹으로 채워지지 않아 흰 부분을 남기며 쓴 글씨다. 붓을 들고 선을 그리면,?획이 거칠 때 또는 부지불식간의 속도에서 희게 나오는 특수한 선의 질감이다. 마치 빗자루로 쓴 글처럼 잔잔한 여백이 남는다.

나는 필획에 나타난 묘연한 붓놀림의 흔적을 마음으로 새긴다. 비백서에는 심후한 공력과 숙련된 필묵의 기교가 어우러져 있다. 가파른 데서 마디가 꺾이는가 하면, 종획에 있으면 험한 절벽을 오르는 듯해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순진무구한 담백미가 검은 바탕에서 삐쳐나온 것도 같고, 눈 내리는 날 아침 아직 첫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 순백의 공간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쓴 이는 먹의 농도나 붓의 종류, 화선지의 성질을 먼저 파악했으리라.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신독愼獨의 자세로 붓을 들었을 것이다. 한 점 한 획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글씨의 뿌리로 삼아, 그의 학문과 재주 그리고 그의 뜻을 글에 다 담았을 듯하다.

온 힘을 기울인다고 해서 그의 예술혼이 다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모자란 듯한 허점이 보태어질 때 그것이 오히려 물상에 기묘한 생동감을 불어 넣어 보다 완벽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금이 간 비자나무 바둑판은 그 금으로 인해 수축과 이완이 일어난다. 그래서 최고의 명품으로 취급받는다. 비백의 글씨도 여백 같은 공간이 상상력을 자극해 천변만화를 일으킨다.

모난 들들이 제각각 물고 물린 돌둑을 본 기억이 난다. 돌둑은 사방연속무늬가 줄지어 늘어선 것 같이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어디 한쪽이 이지러져 볼품이 없었다. 반반한 돌은 보이지 않고 우환을 당한 흔적인지 푹 꺼져 울퉁불퉁했다. 석수가 망치로 돌을 깨뜨려 일부러 흠을 낸 흔적까지 나타나 있었다.

돌에 생겨난 요철 모양이 둑 쌓는 데 더없이 요긴한 암수 나사 역할을 한다. 획을 그을 때 붓을 살짝 비틀어 허점 같은 공백을 마련하는 비백의 원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일부러 비백을 넣어 흑과 백이 뒤섞이도록 한 것이다. 먹물을 듬뿍 묻힌 다음, 붓끝에 힘을 실어 긋는 흑서의 위용도 만만찮지만, 채움과 비움이 혼효된 채 한꺼번에 휘감아 돌아가는 비백서의 자태는 궁극을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의 결의에 찬 모습 같다. 저 비백서를 쓴 이의 의도는 멀쩡한 돌에 흠집을 내는 석수의 의도와 다를 바 없다.

비백을 처음 사용했던 옛사람은 필획 속의 여백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아마도 우리네 삶을 떠올렸지 싶다. 허점 없는 삶은 없다. 이것을 묵서에 형상화 시켜보자.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리라. 묵 빛에 초월적 이미지가 나타난 비백서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만 같다. 흩어져 있어도 어느새 하나로 모이고, 다시 밤하늘의 별처럼 흩뿌려져 반짝이는 비백. 비백이 이렇듯 끊임없이 사유의 공간을 확장할 줄 알았던 옛사람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다시 병풍에 글쓴이의 마음을 열어본다. 용필用筆은 마음에 달렸다. 마음이 바르면 붓이 바르고 바르지 못하면 붓이 넘어진다고 했다. 그도 누구의 별이 되어 빛나고 싶었을까. 온축된 인덕이 구체화하여 나타나 있는 듯하다. 손끝에서 나오는 기예가 아니다. 그는 허점이 드문드문 나 있는 자신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허점 같은 비백이 초묵의 짙은 검은색과 어울려, 또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날카롭고 매서우며 법도가 삼엄한 가운데 심후한 공력이 뭉쳐있다. 그와 같은 예리함이 대나무처럼 힘 있게 뻗은 초묵의 질주를 제어한다. 급박한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그것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해, 보는 이로 하여금 존재의 전반을 관조하게 한다. 허점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어디 한 군데라도 나무랄 데라곤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아 태평한 듯도 하고, 뛰어나게 훌륭한 것도 같아,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은 뭔가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허점을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을 처음 대할 때 먼저 그 사람의 허점부터 살폈다. 상대가 허점을 보여야 정이 가고 다가가기 쉬웠다. 좋은 면만 보고 가까이했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며 돌아설 때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가슴앓이로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나는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의 허점이 나타날 때까지 마음을 주지 않고 기다렸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그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나와는 또 다른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망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화를 잘 내는 편인데, 그는 너무 느렸다.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히죽이 웃거나, 조용히 있었다. 참다못한 누군가가 그에게 가시가 돋친 말을 던졌다. 화를 낼만 했는데도,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답답할 정도로 미련스러운 것이 그의 허점이었다.

한심할 정도로 무심한 그의 허점은 알게 모르게 내가 본받아야 할 롤 모델이 되었다. 그의 허점을 받아들이면서 스르르 그에게 물 들어갔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르면서 어긋나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었다. 허점이 있어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두터운 믿음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필세가 역동적인, 병풍 속의 비백서를 새롭게 본다. 비백은 여백인데도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적 허상이 아니다. 형상화된 것에 의한 또 다른 형상이다. 그 형상이 바탕의 검은 색과 뒤엉켜 의미를 창조한다. 그것은 허점의 의미체계이기도 하다. 허점은 융합하려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의미의 절연에서 오는 비백이 허점의 진기함을 다하는 듯하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