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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금상] 김영숙 '노아의 방주'
[소설 금상] 김영숙 '노아의 방주'
  • 경북일보
  • 승인 2019년 11월 18일 21시 5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 1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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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부문 금상

게임 톡에 접속하자마자 채팅창에 글들이 올라온다. 노아는 헤드셋을 고쳐 쓴다. 이 세계에서 노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노아의 스타크래프트 통산 전적은 5만 전 4만 3000여 승, 승률 상위 1%에 속한다. 노아는 자칭 고수인 하수들과 또다시 2대 2 게임을 시작한다. 오후의 팀 메이트 역시 간밤의 좀비#이다. 노아는 저그를, 좀비#은 프로토스를 선택한다. 상대방도 같은 종족 배치다. 예상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9분 40초 만에 상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둔다. 18연승이다.

노아가 싱크대의 수도꼭지에 입을 갖다 댄다. 미지근한 수돗물이 목구멍을 적시는 동안 초인종이 울린다. 1층 할머니의 심술 맞은 얼굴이 떠오르는 바람에 콜록거리며 사레가 든다. 할머니는 밀린 수도세나 전기세, 방세 따위를 받으러 하루에 한 번은 방문하는 성실하고 성가신 집주인이다. 10분쯤 버티면 할머니는 혼자 손잡이를 비틀어대다 2층 층계를 내려갈 것이다. 현관에서 택배요, 택배, 라는 낯선 사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옷을 입은 택배기사는 저만큼 꽁무니만 보이고 현관 앞에 라면박스가 놓여 있다. 발신인은 아빠다. 아빠는 수신인란에 엄마 대신 노아의 이름을 써놓았다. 상자가 보기보다 묵직하다. 부엌칼로 테이프를 가르고 내용물을 덮은 신문지를 벗기니 쌀, 김, 멸치, 캔 참치 등이 포장째 들쑥날쑥 들어있다. 당장 입에 털어 넣을만한 것은 없지만 모두 일용할 양식들이다.

김이 든 검은 비닐 사이로 하얀 봉투가 눈에 띈다. 편지 따위는 없고 두툼한 봉투 속에 낡은 지폐가 가득하다. 만 원짜리 스무 장, 천 원짜리 서른 장, 모두 이십삼 만원이다. 다시 한번 찬찬히 그것을 세어본다. 정확하게 이십삼 만원이다. 천 원짜리 서른 장은 아무래도 부록이나 사족처럼 여겨진다. 천 원짜리 삼만 원은 슬쩍해도 모양새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천 원짜리 서른 장보다는 만 원짜리 세 장이 날렵하고 간편해 보인다. 만 원짜리 열일곱 장과 천 원짜리 서른 장으로 이룬 이십 만원이 엄마에겐 더 감동적일 것이다. 좀처럼 소식 없는 아빠가 금액을 확인할 리 없고 그럴 일도 없어야 한다. 노아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만 원짜리 석 장을 뒷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엄마의 몫이 담긴 봉투는 완전변태 참고서 한국 근현대사 중간에 끼워 둔다.

-하이, 아피에서 보자.

소녀다. 가끔 문자는 주고받았지만, 소녀를 못 본 지 석 달이 넘었다. 소녀는 한 번도 먼저 보자고 연락해오는 법이 없는 졸라 약은 계집애다. 노아는 시시껄렁한 여자애들에게서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애니팡 톡 사이로 즉시 콜을 보낸다. 피시방 근처 J 피자점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피자를 사주겠다는 문자와 함께 업그레이드된 피자 이모티콘도 덧붙인다. 개미집 투시도 같은 화면은 일정하게 요동치고 커서는 계속 깜박인다. 게임과 게임 사이, 채팅은 욕투성이다. 노아는 좀비#에게 졸라 미안, 이라고 치고 나가기를 클릭한다.

소녀는 한참 동안 답을 달지 않는다. 글을 읽지도 않는다. 소녀는 또 제 아빠 핑계를 댈 것이다. 소녀의 엄마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운전기사 일을 하는 소녀의 아빠는, 수업을 빼먹고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노아를 불가촉천민쯤으로 여긴다. 친아빠도 아니면서 소녀를 지극정성으로 에스코트하는 그는 외동딸 소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것이 지상 최대 목표인 소녀 엄마의 명을 받들어, 노란 학원버스로 소녀의 등하교는 물론, 주말 과외와 야간과외 때도 차를 태워준다. 그러니 노아는 도무지 자신을 만날 틈이 없다는 소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노아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또 초인종이 울린다. 이번엔 진짜 주인집 할머니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할머니는 집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속 초인종을 누른다. 문도 함께 두드린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 안 열고는 못 배긴다. 인내와 끈기로 어우러진 노파의 집념에 대항할 세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차라리 문을 여는 편이 낫다. 때론 정면 대결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기도 하니까.

“노아 엄마 왔나?”

재가 간병일을 하는 노아의 엄마가 이 주에 한 번, 주말에만 온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늘 같은 질문을 한다. 현관문을 다 열기도 전에 할머니의 고약한 입 냄새가 노아의 후각을 공격한다. 화장실 옆 하수구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할머니의 마뜩잖은 표정은 변함없지만, 오늘따라 안색은 더욱 누르스름하다. 노아가 숨을 참으며 전방위 방어태세로 선제공격에 나선다.

“여기요.”

노아는 집안으로 들어서려는 할머니를 제지하기 위해 이십만 원이 든 하얀 봉투를 재빨리 할머니 앞에 들이민다. 할머니의 투미한 눈과 파리한 입술이 금세 벌어진다. 두툼한 돈 봉투를 받아든 할머니는 손가락에 침을 퉤퉤, 뱉어가며 지폐를 한 장씩 세어본다. 뒤편의 천 원짜리를 보는 순간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 할머니가 혼잣말을 내뱉는다.

“이걸로 또 몇 달을 개길 심산이구만, 쯔쯧!”

평소 같으면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갈 할머니가 현관에서 그냥 돌아선다. 지폐의 힘을 목도 하는 순간이다. 할머니가 끄는 슬리퍼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폰 속 소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대신 엄마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엄마의 문자는 매번 길고 내용은 똑같다. 밥 챙겨 먹었나, 학교는? 수업 빼먹지 마라, 이제 고등학생이다, 공부에 집중해라, 재수는 안 된다, 과외는 못 시켜줘도 대학은 보내줄 테니까. 제발 게임 좀 줄이고 책도 좀 읽장!……. 넹, 노아는 한 음절로 엄마의 2차 잔소리를 차단한다.

겉옷을 걸친 노아가 집을 나선다. 일 층으로 내려가는 좁은 층계의 경사는 직각에 가깝다. 옥상 텃밭에 물을 주거나 빨래를 널고 걷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는 주인 할머니가 신기할 뿐이다. 물기 어린 가파른 층계를 급히 내려가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일층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뇌진탕으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약아빠진 일본원숭이 같은 주인 할머니는 곧 죽어도 눈앞에 돈만 보이는 모양이다. 무심코 붙잡고 있는 쇠 난간에서 녹물이 묻어난다. 칠이 벗겨진 손잡이 겸 난간에 옷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층계를 내려온다. 땅바닥의 하늘색 페인트 찌꺼기들이 발바닥에 들러붙는다.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후드득, 듣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제법 굵다. 장마철답게 비는 종일 오락가락, 하늘은 낮고 흐리다. 노아는 우산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허름한 우산을 쓰느니 차라리 비를 맞는 편이 낫다.

“하이야 하야 …….”

층계를 다 내려서서 주인 할머니 집 현관을 지나 대문으로 향하는데 대문 옆 화장실에서 할머니의 신음이 들려온다. 노아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인다. 나사가 빠져 삐딱하게 닫힌 화장실 문 사이로 할머니의 주저앉은 모습이 보인다. 노아를 본 할머니가 더욱 다급하게 쉰 소리를 낸다. 혼자 사는 주인 할머니는 노아가 들을 수 있게 여태 고함을 질러댄 모양이다. 노아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조금 전 할머니와 말을 섞은 여파랄까. 평소 같으면 할머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고, 신경도 쓰지 않고 튀어 달아났을 것이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만 간신히 까딱거리는 할머니는 언제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뒷벽에 붙어 나자빠져 있다. 노아가 다가가 부축해서 일으키려 하자 손사래를 치며 비명을 질러댄다. 이런 쉬바, 화변기에 대변이 한 무더기 고여 있다. 일단 코를 막고 파이프 밸브를 열어준다. 코로로록, 물이 쏟아지며 변기에 고여 있던 대변을 쓸어간다. 할머니의 누리끼리한 엉덩이와 사타구니 그리고 노아의 흰 운동화에도 똥물이 튄다. 쓰발!

그래, 이럴 때 119를 불러야 하는 거지. 노아는 집 위치를 꼬치꼬치 묻는 소방대원과 통화를 하면서 존나,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만우절에 장난 전화를 건 적이 있었는데 혹,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100% 리얼이다. 혹시 그렇더라도 정상 참작해주겠지. 꼼짝 못 하는 할머니는 입만은 살아서 딸도 불러달란다. 남에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주저 없이 불러준다는 건 겁나 다급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노아가 급히 할머니 집 방안으로 들어간다. 안방의 커다란 텔레비전이 저 혼자 큰소리로 떠들고 있다. 전화기 앞 벽면에 휴대폰 번호가 적힌 종이쪽지가 붙어있다. 노아는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맨 위 칸의 큰딸 상화, 라고 적힌 번호를 누른다. 다행히 딸이 즉각 전화를 받는다. 놀라는 딸, 상화에게 상황을 대충 말해주고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전화기 옆 검은 성경책 갈피 속에 노아가 할머니에게 건넨 하얀 봉투가 끼워져 있는 게 보인다. 노아는 얼른 그걸 제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제 것을 챙기는 듯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박복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엄마, 박미경 여사에게 아빠가 모처럼 보낸 사랑의 정표 아닌가. 그 돈은 누가 뭐래도 엄마의 것이고 엄마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노아가 소녀에게서 문자가 와 있나 확인해본다. 아직 1이라는 숫자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할머니 몸이 그새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노아는 할머니 몸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귀찮기도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노아는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대문 속 쪽문을 나서려고 몸을 굽히다가 구급대원들과 맞닥뜨린다. 아무리 소방서가 길 건너편에 있다 해도 너무 빨리 출동한 것 아닌가. 구급 대원 둘이 군데군데 빗물이 고인 마당에 들것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안아 올려 눕힌다. 비 때문인지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는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한다. 평소 할머니 성격이라면 온갖 말을 다 지껄였을 것이다. 아직 딸은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노아가 보호자로 따라가야 할 상황이다. 이런 시벌!

노아는 소녀를 만나기는커녕 난데없이 119구급차에 오른다.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하고 보니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사람들이 쳐다본다. 존나 쪽팔린다. 노아는 할머니가 옮겨진 간이침대 곁에 어정쩡하니 붙어서 있다가 간호사가 물어보는 말에 시큰둥하니 마지못해 대답한다. 노아가 이층집에 세 들어 사는 학생이라는 걸 말끝마다 덧붙이자 간호사는 노아를 확인하듯 한 번 쏘아본다. 드넓은 응급실은 아픈 사람은 물론,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진과 보호자들로 붐빈다. 할머니의 침대는 자리 배정을 받지 못해 응급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긴박하고 소란스러운 응급실은 왠지 활기가 넘쳐 보인다. 그렇지만 다치거나 아파서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오는 사람들과 가까이서 부대끼니 노아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진다. 매일 아픈 사람을 대해야 하는 엄마 생각도 난다. 엄마의 엄마는 요양병원에 두고 다른 노인을 돌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그래도 난리 북새통 같은 병원보다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도 있다는 주택에서 재가 간병일을 하는 엄마가 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분해진 노아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려는데, 할머니의 큰 딸인 듯 덩치가 산만 한 아줌마가 침상을 두리번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엄마, 괜찮나? 아이구, 이게 무슨 난리야!”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씩씩대는 딸은 엄마 또래쯤으로 보인다. 노아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허둥대는 딸에게 할머니를 인계하고는 얼른 응급실 문을 나선다. 응급실 주변 마당은 차량으로, 보호자로, 링거를 꽂은 환자들로 어수선하다. 노아는 병원을 뒤로하고 대로를 향해 뛰다시피 걷는다. 소녀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지만, 호주머니에 두툼하니 돈 봉투가 집히는 것이 씨익, 입가에 미소가 절로 인다. 막노동을 하고 일당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내일모레면 돈을 받아들고 기뻐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니 더욱 흐뭇해진다. 그래, 누가 뭐래도 이건 처음부터 엄마의 몫이었던 거다.

소녀랑 자주 만났던 아이센스 피시방은 병원 건너편 시장통에 있다. 노아는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려다 멈칫한다. 가로수 사이로 사망사고의 뺑소니 차량을 찾는다는 플래카드를 발견하고는 육교층계를 용수철처럼 뛰어오른다. 육교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간판들이 만장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을 완화시킨다는 치질 연고가 사방연속으로 붙은 우리 약국을 시작으로 도시는 온통 광고로 뒤덮여있다. 빼곡한 로고와 문자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 보이는 끝자락에 푸른 유리로 외관을 리모델링한 보람상조 건물이 있다. 4층 아이센스 피시방은 언제부턴가 게임을 하는 아이들보다 잠을 자는 어른들이 더 많아 부쩍 후진 곳이 되어버렸다. 피시방 절반을 만화방으로 내주면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노아는 소녀에게 또 문자를 하려다 망설인다. 노아의 문자를 대하는 소녀의 자세는 그녀만의 특기이자 무기이다. 여태 아무 대꾸가 없는 걸 보면 소녀는 오늘도 약속을 지키지 못할 모양이다. 자의든 타의든 소녀는 말과 행동이 다른 애니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신제품 컵라면을 먹는 뚱보 개그맨의 얼굴이 캐리커처로 그려진 편의점 파란 배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노아는 라면으로 애벌 요기를 할 생각에 침이 고인다. 봉투를 건드리지 않고도 소녀에게 피자를 사주고 컵라면 하나 정도는 너끈하게 사 먹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식사 대용이었지만 한 번도 질린 적 없는 라면은 누가 뭐래도 노아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힐링 식품이다. 심지어 노아의 희망이자 미래다. 노아가 피시방에서 막 출시된 카레 라면을 끓여주었을 때 소녀는 엄지 척을 해주었다. 학교 때려치우고 피시방에서 라면이나 팔까? 종일 게임도 하면서…….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렇지만 노아는 진심이었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한이 이상형이었고, 블리자드의 마이크 모하임 CEO가 궁극적 목표였으므로, 피시방을 운영하며 맛있는 라면을 파는 것은 꿈을 위해 반드시 내디뎌야 할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실은 언젠가 배틀넷을 통해 데뷔하거나 E 스포츠의 중계자가 되는 것이 노아의 진짜 꿈이다. 관전 포인트가 아쉬운 스타크래프트2나 스타리그보다는, 안정적인 화면을 제공해 중계가 용이한 리그 오브 레전드가 매력적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개발사인 라이엇 게임즈는 세계 최강팀을 가리는 월드 챔피언십을 개최하며 E 스포츠 팬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얼마 전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이 서울 상암에서 개최됐을 때는 무려 4만 명이 넘는 유료관객들이 참가했다. 그때 노아는 실버 석을 예약하고도 입장료 이만 오천 원을 제때 송금하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맛있는 라면을 먹으며 안락한 공간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면, 게이머들은 보다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피시방은 행복한 놀이터여야 한다는 것이 노아의 모토다. 맛있는 것 또한 행복이므로 라면은 행복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피시방을 운영하려면 피시방의 주메뉴인 라면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노아는 웹 서핑으로 세계의 라면 종류에 대해 조사도 해두었다. 석 달 전, 노르웨이의 라면 왕 아저씨가 방한했을 때는 수업을 빼먹고 행사장에 가서 사인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날 노아는 소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었고 원한다면 라면코너를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내내 콧방귀를 끼던 소녀는 해당 사이트의 인증샷과 댓글을 보고서야 감탄사를 아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완성에 좀 유치하긴 해도 노아는 소녀에게 라면에 대한 자작 랩까지 들려주었다. 소녀는 그날 노아에게 완전히 반한 듯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처럼 오래오래 키스할 수 있었으니까. 둘은 그날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레벨을 올리고 나면 다소 심드렁해지고 레벨 또한 좀처럼 오르지 않는 게임의 세계처럼 노아는 한동안 소녀를 만날 수 없었다.

-어디? 나 학원 찍고 아피 앞

역시 소녀다. 노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은 여전하다. 노아는 설익은 컵라면의 국물을 먼저 한 모금 맛본다. 익지 않아 딱딱한 면발은 과자처럼 고소하다. 차츰 쫄깃해지는 면발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은 온도에 따라 다른 맛을 자아낸다. 후루룩, 반쯤 남은 컵라면을 마시다시피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야, 올만!”

모퉁이에서 소녀를 본 노아는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쿨한 척하느라 한 손을 높이 들어 보이고는 건물 층계를 오른다. 4층까지 단숨에 이른 노아가 출입문 위쪽 유리를 통해 피시방 안을 들여다본다. 카운트 옆 구석진 곳에 자주 보는 늙은 취준생 둘이 엎드려 자는 모습이 보인다. 늘 앉는 노아의 자리엔 아웃도어 차림의 중년 사내가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간당 900원인 피시방은 바로 옆 만화방보다는 비싸지만, 여관의 반값도 되지 않아 이 시각이면 하룻밤 쪽잠을 자려고 입장한 노숙자 아닌 노숙자들로 물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노아의 밥인 중학생 조무래기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도 빈자리가 없다. 노아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기는커녕 혼자 앉을 자리마저 마땅치 않다. 별수 없이 층계를 서너 개씩 건너뛰어 내려오는데 백 팩을 둘러멘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노아를 노려보고 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작은 어깨를 덮은 풍성하고 검은 머리칼, 하얀 블라우스와 푸른 체크무늬의 짧은 교복 치마, 웹툰 속 여주인공 코스프레가 따로 없다.

“피자 사준다며? 이거 어디서 퍽쳤냐?”

소녀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놀린다. 노아는 소녀의 상큼 도톰한 입술에서 험한 말이 나올 때마다 신기하다 못해 신선한 느낌이 든다. 노아는 소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녀 등짝에 붙은 불룩한 백 팩을 툭툭, 친다.

“웬 거냐?”

“나 집 나왔어.”

소녀가 뾰로통하니 입을 내민다. 노아는 흥, 하며 가볍게 콧방귀를 날린다. 임기응변에 능한 소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간 망한다. 물론 대부분은 소녀의 아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애정표현이 과하다는 소녀의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기에 그녀의 거취가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소녀는 그날 이후 번번이 약속을 어긴다. 아빠를 방패 삼아 다른 녀석들을 만나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노아는 뜻밖의 오기가 생겼다. 게임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그것이다. 남들은 중독이라 하겠지만 노아는 차근차근 게임 레벨을 올리는 중이다. 게임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어디든 자신 있다. 대중적인 메이플스토리 광일 뿐인 소녀는 깜냥도 안 된다. 정시든 수시든, 적어도 소녀가 가는 대학보다는 순위가 높은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에 올라 그녀만의 해바라기가 될 작정이다.

“뻥 치시네!”

“정말이야!”

소녀는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다. 소녀보다 한 걸음 앞장선 노아는 줄지어 선 건물의 핸드폰 대리점과 크리스털 존, 팬시 선물점 등을 지나쳐 두 판시키면 한 판이 공짜라는 붉은 광고지가 나붙은 피자가게로 들어선다. 인근 보습학원에서 수업이 끝났는지 가게 안은 학생들로 만원이다. 적당히 끼어든 노아가 쉬림프 골드 레귤러 한판을 주문하고 피자점을 빠져나온다. 소녀가 개업 화환이 놓인 팬시점 앞으로 노아를 이끈다. 작은 인형과 필기구, 열쇠고리 등이 빼곡히 진열된 쇼윈도우 조명이 지나치게 밝고 화려하다. 튼실한 노아의 상반신과, 상대적으로 더 야위어 보이는 소녀의 실루엣이 유령처럼 유리에 겹쳐 비친다.

“저거, 예쁘지?”

소녀가 엄마 코알라에게 업혀있는 아기코알라를 가리킨다. 노아가 성큼 가게로 들어가 냉큼 그 열쇠고리를 집어 든다. 생각보다 비쌌지만, 거금이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엄마의 몫이 조금 줄어들긴 해도 그게 없어진 게 아니라 소녀에게로 간 거니까. 코알라의 앙증맞은 얼굴이 잘 보이도록 소녀가 백 팩 지퍼에다 그걸 매단다. 잠시 소녀의 표정이 밝아진다. 소녀가 담배 두 개비를 꺼내 노아에게도 하나 물려준다. 붉은색 말보로는 가끔 노아가 피시방에서 피우던 흰색보다 가늘고 독하다. 안개비가 흩뿌리는 거리에서 들이켜는 담배가 매큼하면서도 달다. 소녀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허공에다 급하고 강한 연기를 뿜어댄다.

“집 나왔다며?”

“나 좀 재워줄래?”

소녀의 애매한 표정과 말투는 애교도 아니고 엄살은 더더욱 아니다.

“너 하는 거 봐서.”

노아가 놀리자 소녀가 눈을 흘긴다.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근데 너네 집 무슨 일 있냐?”

노아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소녀는 대꾸 없이 담배만 거푸 피워댄다. 소녀의 그윽한 눈빛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다. 오락가락하는 비처럼 갈피를 잡을 순 없지만, 평소보다 차분하고 어둡다. 피자가게에서 학생들이 무더기로 빠져나온다. 주머니에 넣어 둔 진동벨이 울린다. 노아가 꽁초를 하수구 구멍에 내던지고 가게로 들어간다. 담배를 마저 피운 소녀가 뒤따라 들어와 빈 의자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는다. 노아가 소녀 앞에 피자 접시를 내려놓고 소스를 뿌리는 동안 소녀는 노아가 하는 양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다.

“뭐 열 받은 일 있냐?”

“제길, 몇 달째 소식이 없어.”

“누가?”

“야, 너 건너편 약국에 가서 시약 좀 사 올래?”

노아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물다 혀를 깨문다. 그날 소녀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노아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것 때문에 소녀를 의심하거나 전근대적인 남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쿠울하니까. 문제는 소녀가 노아보다 더 쿠울하다는 거였다. 매번 소녀는 노아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 노아가 소녀의 배를 흘끔 쳐다본다. 소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접힐 듯 홀쭉하다.

“야, 너 자꾸 뻥 치지 마.”

노아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노아는 크러스트와 핫소스를 잔뜩 뿌린 피자 한 조각을 통째 입속에 욱여넣는다.

“흥! 왜, 겁나냐? 걱정 마, 죽어버리면 되니까.”

소녀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포크를 피자에 내리찍는다. 평소에도 죽고 싶다는 말에 입에 달고 사는 소녀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욱 수위가 높다. 게다가 진지하기까지 하다. 노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피자만 집어 먹는다.

“야, 내 말 씹냐? 나 오늘 죽을 수도 있다니까!”

소녀의 음성이 갈라진다. 직설적이고 터프한 소녀의 말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턱 걸린다. 소녀는 피자 한 점 맛보지 않고 포크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진짜 죽을 사람은 죽는다고 말하지 않거든.”

노아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녀의 말을 받아친다.

“야!”

소녀가 냅다 고함을 지른다. 주변 손님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돌아본다. 소녀의 히스테리에 익숙해져 있는 노아는 그리 놀라지 않는다. 다만 기분이 좀 나쁠 뿐이다. 이럴 땐 맞짱 뜨거나 어긋나기 작전으로 나가야 한다.

“나 지금 무지 배고프거든. 곧 뒈질 것 같거든.”

노아가 게걸스레 피자를 먹어치운다. 목이 멘 노아가 벌떡 일어나 리필 콜라 한 컵을 받아온다. 벌컥거리며 들이켜는 노아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던 소녀가 테이블 위에 뺨을 대고 엎드려버린다. 또르륵또르륵, 손가락 끝으로 피아노 치듯 바닥을 두드려대는 것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정도에서 성질을 죽일 소녀가 아닌데 뭔가 일이 단단히 생겨버린 것 같다. 노아는 남은 피자를 마저 입에 털어 넣으며 소녀의 백 팩을 챙겨 든다.

“가자, 오늘 마누카 허니 아이스크림에다 서방님이 레벨 왕창 올려줄 테니까.”

“미쳤냐? 누가 내 서방이래?”

소녀는 노아의 말을 거칠게 받아치면서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아는 소녀에게서 불쑥불쑥 뿜어져 나오는 불온한 기운이 불안하다. 소녀의 말이 부디 농담이길 바라는 마음 가득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 오늘 돈 많아. 우리 기분 전환하러 가자.”

“야, 난 정말 죽고 싶다니까. 수면제 모아 둔 것도 있어.”

소녀가 노아의 귀에다 대고 뇌까린다. 노아는 소녀의 얼굴에 피로감이 팽배해 있음을 본다. 그림자처럼 붙어선 소녀에게서 시든 장미꽃향이 나는 것도 같다. 어중간한 성적과 아빠의 과한 관심, 엄마의 욕심 등으로 공부 스트레스 또한 장난 아닌 소녀는 정말 죽고 싶은지도 모른다.

“너 자꾸 까불래?”

“그만 됐고, 나 피곤해. 너네 집에 아무도 없지?” “우리 집엔 왜?”

“걱정마, 거기서 뒈지진 않을 테니까.”

소녀가 도로에 내려서더니 다짜고짜 택시를 잡는다. 노아는 소녀에게 들릴 듯 말듯 씨발, 욕을 하며 땅에다 침을 뱉는다. 기분이 엉망일수록 게임 생각이 간절해진다. 노아의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시계를 보니 저녁을 먹고 야자를 빼먹은 친구들과 한창 게임에 몰두할 시간이다. 소녀가 먼저 택시에 몸을 밀어 넣는다. 어쩌면 소녀는 그날처럼 노아의 품에 다시 안기고 싶은지도 모른다. 택시기사의 같잖아하는 눈빛을 쏘아보며 노아가 소리를 내지른다.

“불이동 버스 종점이요!”

집 앞 산복도로에서 차가 멈춘다. 길이 좁고 경사가 급해도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시간도 택시비도 절약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꾸벅꾸벅 졸던 소녀가 눈을 뜬다. 머리가 희끗한 택시기사는 말없이 차비를 받고 거스름돈을 내준다. 노아는 한풀 꺾인 소녀의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부축하듯 내린다. 그동안 바깥은 어둠이 내렸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소녀는 하품을 하며 손수건을 펼쳐 머리에 쓴다. 시멘트로 아무렇게나 포장된 집 앞 오르막길에는 여기저기 길고양이들의 똥이 싸질러져 있다. 집 없는 녀석들의 집단 퍼포먼스 장소인 듯하다. 좁은 골목길에 빗물로 짓이겨진 똥을 피하느라 둘의 시선은 온통 땅바닥을 향한다. 노아는 집으로 가는 길이 좁고 가팔라 지난번에도 소녀에게 쪽팔리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생뚱맞게 밝은 가로등 덕분에 비를 맞고 있는 골목의 치부가 오롯이 드러난다. 소녀가 코를 막고 미간을 한껏 찌푸린다. 노아는 소녀의 책이라도 찢어서 똥을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저러나 한눈을 팔거나 방심하면 재수 옴 붙기에 십상이다. 다행히 둘은 무사히 언덕배기에서 제일 높은 집 녹색 대문에 다다른다.

“아, 학생, 아깐 고마웠어. 집 좀 잘 부탁해.”

막 대문을 나서던 할머니의 딸이 노아에게 아는 체를 한다. 딸은 응급실에서 볼 때와 사뭇 인상이 달라 보인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그 새 볼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너구리처럼 눈가가 까매진 것 같기도 하다.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든 그녀는 쇼핑백에 입원 용품이라며 무언가를 잔뜩 챙겨나간다. 그녀는 노아의 뒤에 서 있는 소녀를 흘깃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등을 보이고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도둑년 같은데?”

노아가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둘은 비를 피하느라 가파른 층계를 단숨에 오른다.

“야, 너네 집은 어째 텔레비전도 없냐?”

거친 숨을 내쉬며 안방에 들어선 소녀가 가방도 벗지 않고 이죽거린다. 소녀는 노아의 집에 올 때마다 텔레비전 타령을 했었다. 노아는 바닥에 깔린 이불을 발로 밀치며 소녀가 앉을 자리를 만들다 만다.

“야, 나가자, 저 아래 무지 큰 티브이 보여줄 테니까.”

노아가 소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돌려세운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방을 나선 소녀가 현관에 오뚝, 멈춰 선다. 소녀의 큰 눈이 티모 모자를 놓칠 리 없다. 리그 오브 레전드 준결승전 때 공동구매해서, 엄마가 처녀 때 수놓았다는 범선 풍경 액자 위에 고이 모셔둔 것이다. 소녀가 냅다 그걸 벗겨 머리에 써본다. 모자 아래 숨어있던 범선 세 척이 오롯이 드러난다. 소녀가 그걸 자세히 들여다본다. 돛 세 개가 팽팽하게 수놓아진 범선의 정교함을 살펴본 소녀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노아는 언젠가 그것이 소녀의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노트북을 집어 든 노아가 소녀를 앞세우고 층계를 내려간다. 개구리 왕눈이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안경이 고글 같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는데, 안경이 부착된 티모 모자를 쓴 소녀는 난간도 잡지 않고 빠르게 층계를 내려간다. 가속도가 붙은 소녀는 가파른 층계도, 폭우도 겁내지 않고 씩씩하게 내디딘다. 노아는 노트북을 옷자락으로 감싼 채 엉거주춤 소녀를 뒤따른다. 소녀가 노아를 이끌고 내려가는 형국이다. 어찌 된 일인지 층계는 빗속에서 오히려 안전해 보인다.

할머니 딸이 문단속을 했겠지만,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할머니는 어쩌면 수술을 해야 하거나 아니면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노아는 호기심과 기대로 달뜬 소녀를 이끌며 능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어스름한 실내는 꿉꿉한 기운과 함께 곰팡내가 동시에 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노아는 자개 일색인 농과 문갑, 커다란 화장대가 빙 둘러 놓인 안방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린다. 높다란 천장엔 가느다란 형광등 둘이 맞대져 있지만, 한쪽에만 불이 온다. 비가 샜는지 천장 곳곳에 거뭇한 얼룩이 보인다. 티모 모자와 젖은 블라우스를 벗어던진 소녀가 발라당 보료 위에 드러눕더니 폰을 꺼낸다. 엄지 두 개로 빠르게 문자를 보내던 소녀가 씨발, 개새끼, 하며 폰의 전원을 꺼버린다. 노아는 못 들은 척 텔레비전을 켜고 볼륨을 조절한다.

“야!, 담배 남은 거 없냐?”

소녀가 누운 채 손바닥을 내민다. 노트북을 열던 노아가 소녀의 손을 쳐낸다. 잠깐 스치는 소녀의 손에서 차고 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넌 이제 피우면 안 되잖아!”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어투가 어릴 적 아빠의 말투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만나는 이마다 해병대 출신임을 강조하던 아빠는 크고 호탕한 목소리에 때로 폭력적이어서, 엄마는 물론 노아를 자주 주눅 들게 했었다.

“왜 안 되는데? 나 죽을 거야, 실컷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가 또 시비를 건다. 노아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피자 한 점 먹지 않은 소녀는 정말 배가 고파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아가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냉장고 안은 된장, 고추장, 김치 따위를 넣어 둔 플라스틱 통이 몇 개 들어있을 뿐 당장 입에 털어 넣을만한 것은 없다. 시큼하고 알싸한 김치 냄새가 코를 찌르자 금세 침이 돈다. 노아가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 불을 켜더니 소녀에게 말할 새도 없이 후다닥 현관을 뛰쳐나간다.

노아는 자신의 몸이 흠뻑 젖은 뒤에야 집에 라면이 한 개도 없다는 걸 알아차린다. 빈손으로 돌아온 노아에게 소녀가 수건을 대령한다. 잠시 혼자 두었더니 소녀는 그새 철이라도 든 모양이다. 노아는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처음 만난 소녀와 소꿉놀이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소녀는 늘 노아의 아내가 되어주었다. 소녀 역시 어리고 철없는 남편인 노아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노아는 아빠처럼 전근대적인 아빠 흉내를 냈고, 소녀는 제 엄마처럼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로 잔소리를 해댔다. 그때만큼 두 사람이 순수했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노아는 부엌 선반 위에서 쇠고기라면 한 개를 기어코 찾아낸다. 먼지가 앉은 봉지를 찢으니 텁텁한 냄새가 확 풍겨온다. 스프를 먼저 풀고 팔팔 끓여내도 냄새는 여전하다. 면발은 불고 국물은 졸아든다. 김치통의 새큼한 김치와는 그런대로 어울린다. 노아는 김칫국물을 넣은 라면 국물을 몇 모금 마셔본다. 곰삭은 젓갈 때문인지 여태 맛보지 못한 깊고 오묘한 맛이 난다. 소녀는 콧구멍과 입을 틀어막고 텔레비전 앞으로 달아난다.

채널을 돌리던 소녀가 슈퍼맨 아가들의 먹방 대결이 나오는 예능프로에 채널을 고정한다. 먹성 좋은 아가들이 돼지갈비와 족발을 양손에 쥐고 뜯어먹는 장면과 소녀보다 몇 곱절은 어린 여자애가 그 아기들을 챙기고 닦아주는 모습에 소녀가 빠져든다. 죽을 거라며 헛소리를 지껄이던 소녀가 잠잠히 텔레비전에 집중하는 것을 보니 노아는 한결 마음이 놓인다. 라면 건더기만을 대충 해치운 노아는 최신 웹툰 동영상을 검색하다 말고 소녀 곁에 다가간다. 노아가 소녀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야, 우리 그냥 결혼이나 할래?”

노아는 한 손으로 텔레비전 음소거를 하며 진지하게 속삭인다.

“네가 아빠라고 장담할 수 없어.”

이런 존나. 순간 노아가 소녀에게서 뚝, 떨어진다. 불쑥 내뱉는 소녀의 대답이 가관이다. 노아는 할 말을 잃는다. 잠시 노아의 것도 소녀의 것도 아닌 침묵이 흐른다. 소녀는 간간이 한탄인지 한숨 소리인지 모를 신음을 뱉어냄으로써 자신이 한 말에 진정성을 더하고 있다. 소녀가 다시 음 소거를 누르고 볼륨을 높인다. 경쾌한 차림의 쇼호스트가 현란한 색감의 아웃도어를 요란하게 소개하고 있다. 소녀는 노아가 먼저 무언가 질문해주기를 바라는 듯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노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마주친 적 없는 낯선 침묵 사이로 오직 게임의 세계가 떠오를 뿐이다. 소녀는 아예 화면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하다.

노아는 다시 폰으로 회귀한다. 액정에서 호모 모빌리스의 귀환을 환영하는 이모티콘이 쏟아져 나온다. 노트북과 폰에서 스테레오로 깜빡이는 좀비#의 초대를 뿌리치고 신생 게임 존으로 들어간다. 갓 출시되어 그래픽이 장난 아닌 갓 오브 하이스쿨의 캐릭터를 늘려가는 동안 소녀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는다. 자동공격도 가능한 팀 레벨 5까지 이르자 소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하던 방안이 소녀의 숨소리로 가득 찬다. 이런 미친. 소녀에게 또 속은 것일까. 밀당의 지존, 소녀답다. 그제야 노아는 다리를 뻗고 자리에 눕는다. 단잠에 빠진 소녀가 깨어나 죽어버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노아도 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까무룩 잠들었던 노아가 요의를 느끼고 눈을 뜬다. 국물이 반쯤 남아있는 라면 냄비에다 실례지만 실례를 한다. 소변 줄기만큼이나 소리가 굵다. 다행히 냄비가 넘치지는 않는다. 지린내 나는 손가락에 피 같은 것이 묻어난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노아의 얼굴이 피투성이다. 굳어버린 피에서는 립스틱 냄새가 난다. 주인 할머니 냄새 같기도 하다. 노아가 얼굴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휴지로 문질러 닦아낸다. 거울 속 노아의 얼굴은 발진이 돋은 것처럼 얼룩덜룩하다. 목 주위 티셔츠 깃에도 핏빛 흔적이 지저분하게 묻어있다. 옷을 빨거나 어쩌면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곤히 자는 소녀의 오른손에 립스틱이 쥐어져 있다. 노아가 립스틱을 가만가만 빼낸다. 립스틱은 닳고 부러져 밑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상태다. 그래도 소녀의 얼굴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양이다. 소녀의 검고 긴 머리칼을 조심스레 걷어내자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뺨과 목덜미가 드러난다. 좀비 놀이라도 한 듯 소녀의 이마는 이미 노을보다 붉다.

새끼손톱만 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소녀의 발치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인다. 통통한 흑갈색에 윤기마저 나는 녀석은 가끔 노아의 집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사이즈가 크다. 녀석이 더듬이를 바투 치켜들더니 아기처럼 쌔근거리며 자는 소녀의 옆구리로 바짝 진군해온다. 녀석이 소녀의 육체를 염탐하듯 주위를 맴돈다. 노아가 손을 들어 내리치려는 순간, 녀석이 순식간에 장롱 밑으로 사라진다. 고요한 중에 녀석이 사각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자못 경쾌하게 들린다. 밤새 녀석은 노아를 잠 못 들게 하고 계속 깨어있게 할 모양이다.

지붕을 때리는 천둥소리가 한차례 요란하게 들려온다.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 날아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는 밖으로 나가 확인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해도 자신이 바로잡아야 할 이유나 책임은 없으니까. 깊은 밤, 빗소리는 점점 더 촘촘해지고 거세진다. 비가 억수같이 와서 홍수가 나더라도 산꼭대기에 있는 이 집과 방은 떠내려갈 염려가 없을 것이다. 세상의 바다에서 외딴섬 같은 방은 방주가 된다.

노아의 열 손가락이 근질근질 춤을 춘다. 좀비#은 여전히 살아있다. 노아는 저그를, 좀비#은 프로토스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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