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물 끼얹은 듯
불타오르는 단풍들
너희는 죽음에 이르는 고빗사위에
가을 호랑이를 빚어내려는가

잘게 썬 빛깔과 짙은 어둠을 우려낸
단풍들이 포효하려는가
익돌근이 만들어 놓은 큰 입처럼

발갛게 타는 노을, 불씨 한줌 넣어 반죽하려는가
몸을 옴나위할 수가 없다
널룽널룽 벗어버린 호랑이 가죽이 땅에
군데군데 늘어져 있다




<감상> 단풍에게서 호랑이를 발견해낸 상상력은 동물과 식물 사이 경계를 허물어뜨리지만, 시인의 눈은 보다 깊은 곳을 응시한다. 단풍잎이 붉게 물드는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현상이므로 이는 중립이 아니라 일방적 질서에 가깝다. 그러나 붉은 빛으로 타오르며 가을을 정열적 낭만으로 장식하는 단풍이 실은 낙엽이 되기 전 쇠잔한 생명을 겨우 유지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풍의 매혹적인 붉은 빛깔 안에는 생명과 죽음이 경계 없이 공존하는 셈이다. 시인은 단풍에게서 생명력을 지니나 죽음에 가까운, 그러나 아직 죽음은 아닌 어떤 중립의 세계를 확인한다. 이러한 시선 역시 삶과 죽음을 이분화된 대립쌍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 관계로 여기는 ‘순환의 세계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제 시를 제가 소개하려니 겸연쩍어서 이병철님(시인 겸 평론가)의 평으로 대신합니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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