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8일까지…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신위, 황공망과 미불을 재해석한 그림,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에 먹, 덕수1626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서화전 ‘자줏빛 노을에 물들다’를 내년 3월 8일까지 연다.

신위는 시·서·화 삼절(三絶)이자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이름 높지만, 그 삶과 예술의 깊이는 잘 알려지지 않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인물을 삼절이라 하지만, 실상 세 가지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성취한 인물은 신위를 빼고 달리 찾기 어렵다.

조선후기 삼절로 꼽히는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시 만큼은 신위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생전에 이미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듯 신위의 시를 읽는다”라고 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고, 20세기에 들어서도 ‘쇠퇴해가는 시대에 훨훨 날아오른 대가’라 하여 고전 문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신위의 시는 청신하고 회화성이 넘친다. 그의 글씨와 그림에도 이러한 시적 정취가 깃들었으니, 시·서·화가 혼연히 하나 된 진정한 삼절이라 할 수 있다.

김정희는 고대 비석 연구를 토대로 독특한 서풍을 창출했고, 신위는 왕희지(王羲之·303~361)를 모범으로 삼아 우아한 서풍을 연마하여 서로 다른 개성을 보여줬다.

신위와 김정희는 모두 윤정현(尹定鉉·1793~1874)을 위해 그의 호인 ‘침계’를 써 주었다. 김정희의 ‘침계’(간송미술관 소장)와 신위의 글씨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서예는 지향점은 다르지만 19세기 조선 문인이 다다른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신위는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딸을 배필로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고 부실(副室) 조씨(趙氏)에게서 네 서자를 얻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명문가라는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양으로 적자를 잇지 않고 네 아들을 동등하게 길러내었다. 그는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고 격려했다.

신위, 대나무,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에 먹, 본관5002
‘시령도’에는 신위 부자의 가족애가 담겨있다. 문장과 산수화로 이름을 남긴 맏이 신명준(申命準·1803~1842)과 화사한 꽃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한 둘째 아들 신명연(申命衍·1809~1886)이 아버지 신위와 합작한 두루마리 작품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처음 공개되는 신위의 필사본 문집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곳곳에도 아이들을 애틋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신위는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 수운(峀雲) 유덕장(柳德章·1675~1756)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혔다.

신위, 윤정현을 위해 쓴 ‘침계’,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에 먹, 구3225
당시의 권세가들은 그의 대나무 그림을 얻고자 앞다투어 찾아왔다. 그가 승정원 승지로 근무할 때 그림을 감히 부탁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하급 서리에게 “내가 어찌 너에게만 인색하게 굴 것이냐”라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대나무를 그려주었다는 일화는 신위의 소탈한 사람됨을 잘 보여준다.

‘그림보다도 가슴 속에 대나무를 완성하는 것이 먼저’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말은 예술에 앞서 인격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묵죽도’의 담백한 붓질에는 사람을 지위로 차별하지 않았던 신위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신위의 예술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생활과 업적이 분리된 시대, 삶과 하나 된 예술을 펼친 너그러운 사람이 그리워진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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