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서비스

[소설 은상] 김영욱 '할머니의 봄 소풍'
[소설 은상] 김영욱 '할머니의 봄 소풍'
  • 경북일보
  • 승인 2019년 11월 20일 21시 25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 12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은상
유병수作

할머니가 사라져버렸다. 할머니의 빨간 윗도리, 할머니의 꽃무늬 몸빼 바지, 할머니의 듬성듬성 털이 빠진 토끼털 조끼가 순서대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사라져버렸다. 할머니의 옷장이 텅 비고, 할머니의 서랍장들이 텅텅 비도록 우리 모두는 믿었다. 할머니가 시집 온 뒤로 아낀다고 입지 않던 한복과 무겁다고 덮지 않은 목화솜 이불을 스스로 치우고 이제라도 집주인답게 안방을 넓게 쓸 마음을 먹었다고.

어느새 지저분한 옛 물건들이 치워진 할머니 방안은 햇살이 뛰어다닐 정도로 넓어졌지만, 할머니는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 방구석에 앉아 해가 달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가 그림자 대신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가 방바닥에 누워 긴 낮잠을 잤다. 꿈속에서도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죽은 금붕어처럼 다시 떠오를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할머니를 기다리지 않았고, 그 누구도 할머니를 찾아보러 나가자며 말하지 않았고,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할머니의 방을 차지하고 할머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신을 신고 나갔다. 할머니는 돼지 저금통에 동전들도 그대로 두고 바람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나갔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가 달랑 남겨둔 물건이 핸드폰인 걸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텅 빈 방에서 할머니 냄새를 기억하는 벽지의 무늬들을 손톱으로 콕콕 눌러보며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기억해내려 애쓸 뿐. 이른 봄물을 먹은 송아지들이 벽지의 무늬 속에 갇혀서 얼룩덜룩 울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생일도 모르는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꿈속에서 누군가 날 툭툭 쳤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난 할머니가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는 줄 알았다. 떠지지 않는 눈에서 눈곱을 떼어내고 겨우 둘러보았을 때에는 창과 벽이 하나의 색깔, 검정이었다.

“네 방에 가서 자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여행 끝나면 돌아오시겠지.”

아빠는 방문을 쾅 닫고서 나가버렸다. 아빠는 할머니가 여행을 갔다고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할머니 방에서 혼자였다. 아니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핸드폰과 함께였다. 서둘러 불을 켜자 달력이 보였다. 숫자뿐인 달력 안에 쳐놓은 동그라미들이 보였다. 동그라미 속에는 하나같이 똑같은 숫자들, 할머니가 빨간 사인펜으로 써놓은 ‘1004’들이 보였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할머니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할머니는 성당에도 다니지 않았다. 할머니는 부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절에도 다니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할머니 자신만 믿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1004라니, 이건 뭔가 새로운데!’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복화술을 하는 아빠처럼 혼잣말을 했다. 아빠는 마술사다. 아빠의 마술은 전부 속임수였지만, 아빠는 사기꾼은 아니었다. 아빠는 직업이 마술사다. 할머니는 그런 아빠를 낳은 분이니까 마술 한 두 가지는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마술을 내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눈을 감으면 할머니가 사라지는 것처럼 할머니가 눈을 감으면 내가 숨을 곳이 우리 집에는 넘쳐 났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하나부터 열까지 셌다. ‘하나, 둘, 셋, 머리카락 보일라, 넷, 다섯, 여섯, 꼭꼭 숨어라, 일곱, 여덟, 아홉, 숨었냐?’ 피식 방구소리가 났다. 이윽고 방구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열을 세기 직전이면 언제나 방구로 팡파르를 울리며 본격적으로 숨바꼭질이 시작된 걸 알려줬다. 나는 얼른 미끄러운 복도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다락방에는 먼지가 많았지만, 다락방에는 발이 많은 돈벌레와 돈벌레를 먹고 사는 거미도 많았지만, 나는 둘 다 죽이지는 않았다. 돈벌레를 죽이면 돈이 새나간다는 미신을 믿지도 않았지만, 거미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도 않았다. 아니,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빠의 마술 상자 속으로 몸을 숨기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숨바꼭질을 한 날이 언제더라?

할머니가 어두운 다락방으로 올라오면 다락방이 환해졌다. 마술 상자 뚜껑의 빈틈 사이로 흐릿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쿵, 쿵, 쿵, 할머니의 발소리 대신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여기 숨었냐?’ 는 능청맞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마치 잘 익은 수박을 두들기듯 마술 상자의 여기저기를 손가락 등으로 두드렸다. 하마터면 ‘아무도 없어요’라고 대답할 정도로 오래 두드린 적도 있었다. 하마터면 ‘아무도 없어요’라고 대답도 못하고 그만 그 좁은 곳에서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수박이 잘 익었나, 어디 찔러 볼까?”

할머니는 칼을 밀어 넣었다. 오른쪽 옆구리 쪽에 하나, 왼쪽 옆구리 쪽에 하나, 정수리 쪽에 하나, 발바닥 쪽에 하나, 마지막으로 배꼽 쪽에 하나, 모두 다섯 개의 칼을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엔 할머니가 손바닥을 탁탁 터는지 박수 소리가 났다. 나는 할머니만의 의식이 다 끝날 때까지 입에 주먹을 밀어 넣고 웃음을 참았다. 할머니가 상자 속으로 칼을 밀어넣을 때면 늘 발가락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늘 배꼽을 간질이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당연히 죽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믿고 있었다. 이 상자 속에서는 누구나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 다락방 상자야.’

나는 아빠의 복화술로 말했다. 복화술로 말할 때는 윗니와 아랫니를 붙이고 공기 반 소리 반이 되도록 혀의 위치를 잘 조절해야 했다. 그래야 감쪽같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만들어준 토끼 인형을 데리고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토끼잠을 자는 토끼는 언제나 눈알이 빨갰지만, 빨간 눈에서 나오는 빨간 불빛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우리는 늘 함께 했다. 다행히 토끼는 올라갈 때가 내려갈 때보다 백만 배 쯤 빨랐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을 내려가는 것보다 십만 배 쯤 좋아했다.

“할머니, 꼭꼭 숨은 할머니, 머리카락 보여요. 흰 머리카락 보여요.”

나는 할머니의 약을 올린 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거미줄이 면사포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면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내려왔지만, 다행히 토끼는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괜찮아. 그냥 낡은 거미줄이야.’

토끼가 놀란 나를 위로했다. 나는 여전히 이 사이로 공기 반 소리 반을 유지하며 ‘고마워, 집토끼야.’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토끼와 내가 ‘할머니’하고 할머니를 동시에 부른 적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사람과 동물 소리를 동시에 내는 재주를 부리는 건 짐승 같은 사람들한테는 가능하다지만, 맹세코 나는 순한 사람이었다.

‘수호야, 칼 꽂을 거야?’

토끼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작은 입술을 더 작게 오므리며, 조용히 하라고 ‘쉬’소리를 냈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토끼는 늘 조금 먹고 동글동글한 똥을 누고 오줌도 내가 하품할 때 나오는 눈물만큼 아주 찔끔 싼다는 것을. 게다가 토끼는 똑똑해서 멍청한 어린애처럼 ‘쉬’소리를 들어도 아무 데서나 오줌을 누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 토끼도 나만큼이나 철이 들어버렸고, 어느덧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할머니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뽀얀 먼지를 지붕 위 첫눈만큼 덮고 있는 아빠의 마술 상자에 첫 번째 칼을 꽂았다. 뜬금없이 할머니가 틀니를 끼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술 상자에 두 번째 칼을 꽂았다. 할머니가 비녀를 꽂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칼을 꽂을 때는 당연히 할머니가 호주머니에 통통한 아주머니 인형을 갖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칼을 꽂을 때는 내 손가락이 떨렸다. 진짜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라면, 할머니는 내 칼에 찔려 죽은 셈이니까.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까지 덜덜 떨었다.

생각이 무서움을 키우는 동안, 밤은 으쓱해지고, 밤이 으쓱할수록 창밖의 벚나무 가지들은 살아났다. 나는 벚꽃이 지는 4월 딱 한 달 동안만 미치도록 벚나무를 좋아했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히는 5월에는 조금만 벚나무를 좋아했다. 그러고는 벚나무 가지마다 잎이 무성해지는 6월이 되면, 토끼 눈알만큼 빨갛던 열매들이 죽어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나는 동그란 유리관 속에서 볼록하게 솟은 살이 뚝뚝 떨어뜨리는 시커먼 피가 무서웠다. 할머니는 아픈 등에 바늘을 꽂고, 그보다 더 아픈 팔뚝을 바늘로 콕콕 쑤시며 나쁜 균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럴 때 할머니는 시퍼렇게 질려서 방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며, ‘괜찮아, 죽은피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피를 흘리는 것을 두 손 놓고 지켜볼 뿐이었다.

죽은피를 생각하니까 드라큘라가 생각났다. 드라큘라는 옛날 아주 먼 옛날, 루마니아라는 나라에서 죽었다 살아난 백작이었다. 아빠는 상자 마술 쇼를 할 때마다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그 드라큘라 분장을 하고, 얼굴에도 하얗게 분칠을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아빠의 떡칠이 전혀 멋져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서워 보였다. 물론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관중석의 사람들은 그런 가짜 드라큘라 백작도 좋아했다.

나는 드라큘라 보다는 진짜 아빠를 좋아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 나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껏 그 누구도 내게 그 끔찍한 태초의 진실을 알려준 적은 없지만, 나는 속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윗니 아랫니를 붙이고 말하는 아빠의 복화술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아무튼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면 무대 위에 매달린 조명등이 마술 상자를 비췄다. ‘두근, 두근, 두근’ 북소리가 울리고 개봉박두!

짠, 상자 속에서 예쁜 도우미 언니가 살아났다. 관중석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아빠, 아니 드라큘라 백작은 검은 커튼과 같은 벨벳 망토를 잡아당기고, 한 발을 다른 발 뒤로 옮기며 무릎까지 굽혀가며 큰인사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천 만 년 쯤 지켜본 사람들은 이외로 단순했다. 사람들은 연극이고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되살아난 언니가 예쁘다는 이유로 휘파람을 불어대며 환호했다. 그럼 드라큘라 백작은, 아니 아빠는 되살아난 언니의 하얗고 가냘픈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내 머리에서 피가 마르기 시작한 뒤로 난 아빠와 드라큘라 백작, 둘 다 미워했다.

아마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엄마는 그 언니를 시기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는 살아나지 않았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신생기 3기쯤엔 나도 아빠가 죽은 엄마를 마술 상자 속에 눕히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 난 말을 할 줄 몰랐다. 맘마만 알던 유치한 나를 대신해서 ‘할머니,’하고 토끼가 할머니를 불러줘도,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할머니’하고, 토끼 대신 할머니를 부르자, 그제야 신기한 듯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할머니 귀속에 사는 달팽이가 토끼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 귀속에서 달팽이가 기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언젠가 한 번은 할머니 방 창턱에다 내 턱을 대고, 토끼는 길쭉한 앞니를 대고 보름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방구석에서 귓구멍을 후비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놀란 토끼 눈이 새빨개지고, 더 놀란 나는 그만 할머니 귀속에서 토끼 똥만한 귀지가 빠져나오는 걸 보고야 말았다. 지금 그 생각을 하면 몹시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내가 너무도 어려서 귀지가 진짜로 똥인 줄 알았다. 토끼가 귓속말로 ‘저건 달팽이 똥이야’라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나보다도 일천 배 쯤은 똑똑한 토끼의 말은 무조건 믿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조각보 자투리 천 조각으로 내게 만들어준 토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토끼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면, 퉁명스럽게도 달님에게 물어보라고만 답했다. 그러면 답답했다. 깜깜한 마술 상자 속에 들어가 있을 때만큼이나 답답했다.

순간, 할머니가 보청기를 빼놓고 아빠의 마술 상자 속에 누워 잠이 든 건 아닌지 궁금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지금 토끼가 이를 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도 할머니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 아니, 아니다. 만약에 할머니가 깊이 잠들었다면, ‘드르렁 드르렁,’ 늙은 사자만큼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를 낼 게 분명했다. 설령 내가 딴 생각에 빠져 못 듣더라도 토끼한테는 손오공의 요술 방망이만큼 길고 최신형 5G 안테나보다 5배나 더 예민한 귀가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요새 깜박 깜박 하는 건 미세 먼지 낀 밤하늘의 별들을 대신해서 할머니가 자주 하는 행동인데, 뭐든 금세 따라하는 나도 그세 배우고야 말았다.

‘아주머니 인형을 불러봐,’ 토끼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인형은 뭐든 쉽게 따라 배우는 내가 뭐든 깜박하고 잘 잊어버리는 할머니를 늘 따라다니라고 만들어드린 손가락 인형이었다. 그런데 나도 인형을 만들기 바빠 그만 깜박하고 놓친 게 있었다. 할머니한테 백날을 손가락 인형 사용법을 가르쳐 들여도 결국엔 까먹고 말거란 중대한 사실을.

손가락 인형의 조작법은 간단했다. 마술 상자에 다섯 개의 칼을 꽂는 것에 비하자면 손가락장갑을 끼는 것만큼이나 단순했다. 제 아무리 이름난 바보라도 손가락만 오므리고 주먹만 꾹 쥐면, 수다쟁이 아주머니의 수다가 곧바로 시작되는 원리였다. 나는 마술사인 아빠를 닮아 과학 머리가 꽤 좋았다. 나와 늘 붙어 다니는 토끼는 나를 닮지 않았는지 언어 머리가 좋았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 점을 채워주고 있는 멋진 한 쌍이었다.

어느 일요일, 토요일에 눈이 내리고 달력이 딱 한 장 남은 12월의 첫 번째 일요일 아침,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려고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잠을 푹 짠 아침이라서 그날따라 내 머리도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쯤부터 할머니는 눈사람처럼 한 자리에 가만있지 못했다. 늘 자신은 살아있는 돌부처라며, 마당 벚나무 밑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염주를 돌리고 있던 할머니는 날 볼 때마다 벚꽃이 언제 피냐고 물었다. 내가 ‘4월은 아직 멀었어’라고 겨우겨우 대답해주면, 지겹도록 ‘4월에는 눈이 와’라고 대꾸했다. 나는 할머니도 나만큼이나 벚꽃이 피는 4월을 좋아한다고 눈치 채고 있었지만, 할머니가 벚꽃을 눈으로 착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그날, 일요일 날 아침, 나는 눈덩이를 굴리다 말고 손가락장갑을 벗어버렸다. 내 마음을 알아챈 토끼도 ‘좋은 생각이야!’라며, 눈 내리는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아빠가 의료기 상점에서 구입한 배회방지기를 장갑 안에 밀어 넣고 바늘을 들었다. 실처럼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는 예쁜 언니가 알려준 공그리기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나갔다. ‘솜씨가 제법이야, 시집가도 되겠어!’ 토끼가 다시 폴짝 폴짝 뛰었다. 그날, 눈이 많이 내린 일요일 날 오후, 아빠는 트럭에 마술 상자를 싣고 떠났다. 실처럼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는 예쁜 언니도 함께 떠났지만, 토끼도 나는 섭섭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할머니의 털 조끼 호주머니에 완성된 아주머니 인형을 밀어 넣었다.

“이 아주머니를 잘 봐,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 인형이 수다를 떠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할머니가 집밖에서 어디 있든 잘 모를 때마다 이렇게 손가락만 오므리라고 했다. ‘하나, 둘, 셋, 머리카락 보인다, 넷, 다섯, 꼭꼭 숨어라,’할머니는 여섯에 꼭꼭 숨어야한다고 우겼지만, 나는 한 손에 딸린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이유로 다섯 다음에‘꼭꼭’을 기억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기억나? 그날 할머니는 배가 고파서 그냥 고개를 끄덕인 거야.’ 토끼가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또 났다. ‘이번엔 내 배에서 나는 소리가 아냐.’ 나는 할머니가 떠준 조끼 주머니 안쪽에서 플라스틱 생쥐가 덜덜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쥐눈이 콩처럼 작은 눈에서는 번쩍 번쩍 빨간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쥐야?’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아니, 핸드폰이야.’ 그제야 나는 할머니의 구닥다리 폴더형 핸드폰을 내 털옷 주머니 속에 넣어둔 걸 기억해냈다. ‘어휴, 간 떨어질 뻔 봤네.’ 토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 사이에서 ‘쉬’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할머니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빠가 전화를 걸었으면 작은 창에 ‘아빠’라고 떠야 하는데, 연녹색의 형광 글자는 ‘천사’였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떨지 말고 받아’ 토끼가 말했다.

“여보세요.”

할머니 목소리가 아니었다.

“느그세요?”

내 목소리가 아닌 토끼 목소리가 나왔다.

“저 혹시 수호 할머니 손자예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나이는 대충 내 또래 같았다. ‘누구야?’ 토끼가 끼어들었다. 나는 얼른 핸드폰의 소리 구멍을 막고, ‘쉬’ 소리로 주위를 줬다. 토끼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음, 제가 수호인데요. 그런데 누구세요?”

내 목소리는 다락방에서 진짜 드라큘라를 만난 아름답지만 아픈 소녀의 목소리였다.

“저, 저는 천사 할아버지의 손자에요.”

내 또래의 목소리도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천사요? 천사 할아버지가 누구에요?”

바보처럼 나는 할머니의 방에서 본 1004란 숫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혹시 할머니가 옆에 계시나요?”

나만큼이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아뇨, 지금 다락방........”

토끼가 얼른 내 입을 막았다. 아니, 내가 내 입을 막았다.

“어젯밤부터 할아버지가 안 보여서요. 식구들이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봤지만 못 찾았어요.”

“그럼, 어떻게 전화를?”

“할아버지는 이 핸드폰도 그대로 놔두고 사라졌어요.”

어느새 남자애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은 듯이 얼룩덜룩했다.

“그, 그래,......요.”

하마터면 반말을 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보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토끼 덕분에 재빨리 내 입을 막을 수 있었다. ‘팽’ 건너편 남자애의 코푸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코웃음이 나왔다. 우리 할머니와 천사 할아버지가 핸드폰까지 놔두고 가출을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우리 할머니도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우리 할머니, 근데 몇 살이야?”

계속 존대말로 상대하려니 답답했다. 난 답답한 건 질색이었다.

“난 초등학교 4학년. 그런 넌?”

건너편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헐! 너보다 한 살 많잖아!’ 토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젠 어쩔 거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랑 동갑. 나는 한 살 늦게 초등학교 들어갔거든.”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입에서 술술 나오는 뻔뻔한 목소리는 착한 토끼의 것도, 가짜 4학년인 내 것도 아니었다.

“뭐?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가?”

건너편 남자애 목소리가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응. 우리 아빠는 마술사거든. 마술사란 직업이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해서 날 제 때에 맞춰 학교에 보낼 수 없었대.”

나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댔다. 내 입에서 술술 풀려나오는 거짓말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화장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죄다 풀어놓는 것도 어쩔 수 없었던 행동이었으리란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그래. 좋아. 너희 엄마는? 너희 엄마 좀 바꿔줘 볼래? 우리 엄마가 어른들끼리 통화하고 싶대.”

순간 난 얼어붙었다. 토끼도 얼어붙었는지, 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해? 엄마 안 계셔?”

남자애가 재우쳐 물었지만, 나는 얼른 잔머리를 굴렸다. 엄마가 아빠 따라 출장을 갔다고 하면, 어디로 갔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볼 게 뻔 할 테니, 아,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내친 김에 거짓말의 단계를 높이기로 작정했다.

“엄마는 게임 대회 나가셨어. 올해는 산타.......”

하지만 말문이 막혔다. 하필이면 그때 산타크로스가 떠오를 게 뭐람. 산타가 사는 나라는 북극 어디에 있을 텐데, 아쉽게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아, 산타크루즈 VR 대회?”

건너편 남자애가 아는 체 했다. 쳇, 재수 없어!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산타크루즈나 산타크로스나 그게 그거 같았다.

“알았어, 그럼, 내가 우리 엄마랑 너희 집으로 찾아갈게. 너희 집 주소 좀 알려줄래?”

남자애는 막힘없이 직진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낮선 사람이 집에 오는 걸 막아야 했다.

“안 돼. 그건 절대로. 우리 엄마가 어른이 없을 때는........”

변명을 하면서도 내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토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네가 우리 집으로 올래?”

남자애는 친절하면서도 끈질겼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슬쩍 아빠의 마술 상자 뚜껑을 옆으로 밀었다. 예쁜 여자 친구가 생기자, 구식이라고 다락방에 놓아둔 아빠만큼 구린 구닥다리 상자였지만, 오래된 할머니의 취향에는 잘 어울렸다. 난 상자 안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안쪽을 살펴봤다. 아까도 없던 할머니가 지금 있을 리 없었다. 아빠의 마술은 산타의 선물 보따리에서 나온 선물은 아니니까.

“그럼 너희 아빠 전화 번호 좀 알려줄래?”

드디어 걱정 했던 질문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방이 내 모습을 볼 수 없단 걸 알고 있으면서도 뒷걸음질까지 쳤다. 층계 쪽에서 느닷없이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토끼가 계단참에 주저앉아 있었다.

“저기 있잖아. 우리 아빠는 예쁜 언니랑 바람났어.”

나는 핸드폰에 대고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다락방에서 서둘러 나가 층계로 내려갔다. 토끼의 몸을 지탱해주는 철사들이 휘어져 버렸다. 토끼의 목도 뒤로 돌아가 있었다. 나도 계단참에 망가진 토끼처럼 주저앉아버렸다.

“지금 뭔 일 있니?”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너머에서 남자애가 걱정을 했다.

“끊을게. 너희 주소는 문자로 알려줘.”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할머니가 사라져버렸다. 할머니의 빨간 윗도리, 할머니의 꽃무늬 몸빼 바지, 할머니의 듬성듬성 털이 빠진 토끼털 조끼가 순서대로 사라져버렸는데, 벚꽃이 피기 시작한 4월부터 첫 눈이 내린 그날까지 감쪽같이 우리를 속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기억이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엉큼한 할머니, 이기적인 할머니, 지금 어딨어?

나는 토끼를 끌어안고 가파른 층계를 내려와 할머니의 빈 방으로 들어갔다. 빈 방에서는 아직도 할머니의 냄새가 나는데, 할머니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로 벚나무 가지마다 올망졸망한 멍울들이 잡혀 있었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또르르 턱밑으로 흘러내렸다.

‘또르릉’

할머니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문자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신화 초등학교 옆 커다란 공터를 200미터 쯤 지나면, 그 옆에 헌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잘 보면 천사 고물사란 간판이 보일 거야.’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더 읽어봤다. 학교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였다. 공터에는 도서관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3년 내내 허허 벌판이었다. 심지어 그곳엔 망태 할아버지가 나타난다는 소문까지 떠돌아다니는 겁쟁이들의 금지구역이었다.

‘고물사?’ 토끼가 아픈 팔을 흔들며 말했다.

‘고물사란 절이 있어?’

내가 날랜 손가락 솜씨로 문자를 찍어 보냈다.

‘고물상인데, 받침 ㅇ자가 사라졌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껏 눈사람을 만들어봤더니, 누군가 머리통만 남기고 몸통을 굴려 가져가버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눈사람 몸통에 입혀 놓은 앞치마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날 밤 예쁜 언니가 부엌 곳곳을 뒤졌지만, 나는 할머니 범행을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도 심술을 부리는 겨.”

그날 밤 할머니가 안방에서 내게 말했다.

“뭘?”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네 엄마 혀. 난 이제 가봐야 허니께.”

나는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방문을 꽝 닫고 나와 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 말은 말일 뿐, 실제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거라고는 꿈속에서도 생각 못했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 봤다. 학교 옆에 진짜로 천사 고물상이 있었다. 간판까지는 이미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헌옷들이 보였다. 하지만 망태 할아버지 소문이 두려웠다. 아빠가 나 혼자 간 걸 알게 되는 날에는 내 방에 한 나절 동안 가둬버릴 게 뻔했다. ‘경찰서에 전화해.’ 토끼가 말했다. ‘싫어’ 내가 대답했다.

자전거 뒤에 토끼를 태우고 공터 앞으로 갔다. 트럭에서 팔다리가 엉킨 옷가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진짜로 ‘천사 고물사’가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뒤에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고물사에서 나왔다. 그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잘 생겼네. 우리 수호 천사 하면 딱 좋겠네.”

언젠가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학교에 오다가 길을 잃고 헤맸을 때 도와주었다던 바로 그 남자애였다.

“수호가 너니?”

남자 애가 허리를 굽혀 운동화 뒤축을 펴더니,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토낄까?’ 토끼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한 발도 꼼짝할 수 없는 마술에 걸려 버렸다.

“응”

“와줘서 고마워. 난 너희 할머니를 본 적 있어.”

남자애가 말했지만, 난 고개만 끄덕였다. ‘너도 봤잖아.’ 토끼가 말했다. ‘쉬’ 얼른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토끼를 돌아봤다. 자전거 뒷자리에 토끼가 없었다.

“사라졌어.”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토끼를 태우고 왔던 길을 두리번거리며 뛰었다.

“뭐 잃어버렸어?”

남자 애가 날 뒤쫓아 왔다.

“토끼, 내 토끼.”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토끼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애가 내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난 달리기를 멈췄다.

“함께 찾자.”

남자애가 헉헉거렸다.

“없으면 안 돼.”

내가 말했지만, 남자애는 고개를 빼고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입 좀 벌리면서 말해줄래?”

남자애가 부탁했다.

“응”

난 고개를 푹 숙였다. 토끼가 없으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해봐. 자, 뭘 찾고 있었니?”

“토끼. 할머니가 만들어준 토끼인형”

남자애는 여전히 내 입술만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할머니?”

난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토끼 인형도 찾아야 했지만, 할머니 소식도 알아내야 했다.

“이리 와봐.”

남자애는 나를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고물사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고물사 둘레에는 벚나무들이 빙 둘러 있었다. 널찍하지만 빼곡한 헌옷들이 차지해버린 마당 한쪽 구석에는 녹색 의류보관함 두 개가 있었다. 그런데 의류보관함들은 세로로 세워져 있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의류보관함 앞으로 달려갔다. 어쩐지 할머니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역시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찾았어.”

남자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할머니랑 우리 할아버지는 이 안에 들어가 계셨어.”

남자애는 코를 훌쩍였다.

“너희 할아버지랑?”

다리가 후들거렸다. 할머니가 새 신을 신고 사라져버려서 할머니가 바람이 난 줄 알았다. 벚꽃, 벚꽃, 하도 벚꽃을 찾기에 지금쯤 벚꽃이 활짝 피었다는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간 줄 알았다. 물론 내 생각이 아니라 아빠의 생각이 그랬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고 할머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여기 안 계셔.”

남자애는 울고 있었다.

“혹시 네가 천사야?”

난 왜 그런 질문을 바로 그런 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토끼가 옆에 없으면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토끼가 옆에 있었으면 당황한 걸 티 내지 않고도 남자애한테 그럼 어디 계시냐고 물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기다리고 계셔.”

남자애가 이 말을 하는 순간, 고물사 안집 마루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할머니의 흰 머리칼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꼭꼭 숨어라, 하나, 둘, 셋, 머리카락 보인다, 넷, 다섯’ 여기에서 그쳐야 했다. 목구멍에 걸린 여섯이 나오질 않았다. 마루 한 편 벽거울 속에 비췬 내 눈이 빨갰다. ‘토끼, 토끼’ 나는 토끼를 부르고 있었지만, 토끼도 내 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엄마가 경찰서에 연락했어. 너희 아빠도 곧 오실 거야.”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무릎 위로 ‘폴싹’ 벚꽃 잎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눈앞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다. 언제였더라, 할머니는 자신의 몸을 실은 관이 불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면, ‘할머니, 밖으로 나오세요.’라고 소리치라고 부탁했다. 나는 내 손을 꼭 그러잡고 그런 부탁을 하고 있는 할머니의 두 손을 뿌리쳤다. 난 할머니의 검버섯이 친 차가운 손만큼이나 그 말이 무서웠다.

‘할머니, 꼭꼭 숨지 말고 나오세요’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아빠는 엉터리 마술사니까 당연히 사라진 엄마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지만, 빙하기 보다 더 오래된 그 옛날 위대한 마술사들도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람을 되돌아오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늘 딱 하루는 내 주문이 할머니한테 제대로 통할 것도 같았다.

‘할머니, 꼭꼭 숨지 말고 나오세요’

다시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벚꽃이 활짝 핀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내 품을 떠나 집을 나간 토끼도 산으로 올라간 좋은 날이었다. (끝)

 

 

경북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