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에 왕이 된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 이전까지 누군가에 의지해 살았다.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수렴청정 이후 10년 동안은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엔 명성왕후 민씨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랫동안 남에게 의지해 왕 노릇을 하다 보니 스스로 판단하는 의지와 결단력이 부족했다. 고종은 결정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무당이나 역술가에 의지했다.

고종을 사로잡은 역술가는 경상도 영양 출신 정환덕이었다.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정환덕은 과거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간 정환덕은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의 전화과장(전화시설을 관리하는 직책) 이재천을 통해 고종에게 추천됐다. 이재천은 정환덕을 고종에게 소개하면서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한 인물”이라고 했다.

고종은 정환덕에게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를 물었다. 당시 ‘왕조의 생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정환덕을 만난 1901년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509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1907년까지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으나 그 이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고종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인재를 얻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정환덕의 원론적 대답에 고종은 실망했다.

실망한 고종에게 정환덕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물러났다. “12월 그믐께 화재 염려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제가 발생했다. 덕수궁 함녕전이 불탔던 것이다. 정환덕의 신통력에 감탄한 고종은 정환덕을 다시 궁전 침전으로 불러 물었다. “앞으로 종묘사직이 편안할지 아니면 위태로울지, 국가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임금인 나도 알지 못하겠다. 이에 대한 것을 들려주겠는가?”

명색이 왕이면서도 고종은 내우외환에 휩싸인 대한제국을 살릴 자신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도 몰랐다. 통치자 스스로의 판단과 결단에 의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나라의 운명을 역술가의 입에 의지했던 것이다. 국운의 향방을 ‘김정은 기만 쇼’에 매달리고 있는 문재인 정권은 고종과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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