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명성은 흔적으로 남았지만 숲이 주는 안식은 그대로

장기숲

포항의 오래된 마을인 흥해, 연일, 청하와 함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깃든 장기는 남쪽으로는 경주시 감포읍과 경계를 하고 있다. 장기의 신라 때 지명은 지답현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장기면뿐만 아니라 구룡포와 호미곶까지 포함되는 넓은 지역이었다. 조선 후기 옛 지도를 보면 현재 포항지역은 청하, 흥해, 연일, 장기 이렇게 4개의 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호미반도까지 장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한양이랑 멀어서였을까. 게다가 바닷가 지역인 장기는 조선시대 유배지로 적격이었는데 이 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온 이상준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장기에 유배 온 사람만 220명에 달한다고 한다. 숙종 때(1675년) 제2차 예송논쟁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리고 정조 때(1801년) 신유박해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로 유배 온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비록 유배로 내려 왔다 하더라도 유배지에 끼치는 영향도 컸다. 저술을 남기고 후학을 키우는 등 학문을 전수하고 문화를 보급하는 일도 자연스레 있었다. 우암 송시열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죽림서원을 비롯 조선시대 장기현에 서원이 12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송시열 선생이 거처하던 곳에는 장기초등학교가 들어섰고 지금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 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가 300년 이상 동안 해마다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물든다.
 

장기숲

예부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 온 장기는 신라 때부터 중요한 군사기지로 자리했다. 이곳에 국가사적 제386호로 지정된 ‘장기읍성’이 있다. 장기의 진산(鎭山)이라고 하는 해발 252m인 동악산에 이어져 있는 장기읍성은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해 지어진 토성이었다가,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왜구를 경계하고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둘레 1,440m의 타원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성문이 세 개인데 동, 서, 북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있다. 얼마 전 성벽을 새로 보수 수리하면서 수원성, 낙안읍성처럼 조선시대 성벽의 모습을 이 곳 장기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게 여간 반갑지 않다. 그리고 다른 읍성과 달리 산 위에 축조되다 보니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뛰어나다. 특히 동문 옹성의 ‘배일대(拜日臺)’는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곳으로 우암과 다산 선생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았다고 한다. 장기는 일출로 유명한 동해안 바닷가로서 회재 이언적 선생도 장기일출을 시로 남겼고 육당 최남선이 조선에 관한 상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답형식으로 쓴 책 ‘조선상식문답(1946년)’에도 장기일출이 언급되어 있다. 즉, 조선10경이라 하여 조선에서 가장 빼어난 10가지 풍광을 시로 지어 실었는데, 장기일출이 포함되어 있다.

읍성에 올라서면 지금은 성 아래 논으로 된 장기들판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나무들로 가득한 장기숲이 있었다. 1938년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의 임수>라는 책이 있다. ‘임수’라는 말은 요즘은 잘 안 쓰는 용어이고, 요즘말로는 ‘마을숲’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강 주변이나 해안에 분포하고 있는 81개 지역의 209개 숲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 책에도 ‘장기임수’ 즉, 장기숲이 나온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숲은 길이가 7리, 너비가 1리 였다고 하며 면적이 지금 단위로 19㏊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도 있었지만 탱자나무, 가시나무 등을 빽빽이 심고 엮어서 목책, 즉 나무울타리를 삼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즉, 돌로 쌓은 산성을 보호하며 성문 앞에 길게 가로로 바닷길을 막는 군사용 역할을 했다. 석성인 장기읍성을 보호하는 또 다른 목성 즉 나무로 만든 성 역할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현을 가르며 신창리 바다로 흘러드는 장기천을 따라 임중리, 마현리, 신창리 일대에 걸쳐 숲이 펼쳐져 있어서 수해와 풍해방지의 효과도 톡톡히 했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하지만 장기숲은 광복 후 장기중학교 건립과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사짓는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숲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장기숲의 베어진 나무는 입찰을 통해 매각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숯장사들이 사들여 임내에 숯가마를 만들고 현장에서 바로 나무를 베어다 숯을 만들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아름다운 이팝나무

지금은 장기중학교 교정에 십 수여 그루 정도의 나무가 남아 숲의 흔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무 한 그루 한그루의 아우라는 대단하여서 훼손 전의 숲의 위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특히 장기중학교 운동장에 200년 된 이팝나무가 있는데, 꽃이 피기 전에는 이팝나무라고 선뜻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왜냐면 이렇게 큰 이팝나무를 보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록이 무성한 여름날, 흰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를 보면 그 황홀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날 크리스마스 트리라니. 흰 꽃이 소복히 피어 있는 이팝나무 노거수는 마치 겨울철 눈 쌓인 여느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더 아름다운 수형에 감탄하게 된다. 또 체육관 앞에는 줄기에 큰 가시가 있는 흔치 않은 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주엽나무이다.

주엽나무 가시

흔히 마을을 지키는 노거수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팽나무가 대다수인데 이 곳에는 수령 150년이 넘는 이팝나무, 주엽나무가 있어 더욱 귀하다. 장기중학교 뒷 교정에는 느티나무, 이팝나무, 팽나무들이 모두 수 백 년째 이곳을 지켜오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정약용 선생도 거닐었을 장기 임중숲이 이렇듯 겨우 몇 그루로 유지되는 모습은 측은하기 그지없다. 학교에서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그마저 있는 나무숲도 방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깝다. 귀한 주엽나무도, 보도블록을 위로 밀치면서 힘겹게 자라고 있는 뿌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200여 년 전, 다산 선생이 유배라는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그나마 나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여기 임중 마을숲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숲이 지금은 무성하게 잡초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숲에서 마주한 고요함과 안식을 통해 위로를 받고 새로워질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숲의 신비이자 삶의 이치라고 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세속의 번잡함과 고단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기에 우리는 숲을 거닐고자 하는 바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헐벗은 장기 임중 마을숲은 그저 보잘것없는 숲이 아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오래된 내력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숲을 가꾸어야 하는 배경에는 단순히 또 하나의 마을숲을 되살린다는 범주가 아니라 지역 자산을 발굴하고 알리는 새로운 시선과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있어야만 우리 지역 자산의 가치가 앞으로 제대로 알려질 것이고, 다음 세대에도 유효한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장기숲을 둘러본 후에는 반드시 929번 국도를 따라 양포초등학교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길 권한다. 초등학교에 다다를 즈음에 짧지만 아름다운 숲길을 만날 수 있어서다. 수 백년 된 느티나무들이 철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 바로 양포 마을숲이 있다.

이재원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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