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대통령 욕하기가 국민 스포츠”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군사독재와 권위주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동안 관성 때문에 조심하던 시기가 지난 직후다. 아무리 험한 말을 하고 막말을 해도 옛날처럼 체포되거나 고문당할 일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봇물이 터졌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욕설, 터무니없는 농담이 민망할 정도로 이어지고 그 끝에는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그 시절 어떤 아들은 서슴없이 대통령이 빨갱이라 하는 아버지에게 그러다 잡혀가시겠다고 했다가 호통을 들었다 한다. “요즘이 어느 시절이라고!”

물론 새로 생긴 이 국민 스포츠가 그 이후 정권들에서도 늘 인기를 누린 건 아니다. “대통령 모독 발언이 도를 넘었다”는 대통령 자신의 경고와 사회지도층의 ‘국격’ 걱정이 신문을 도배하기도 했고, 노골적인 언론 길들이기나 친정권 미디어 창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치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 욕하기는 이제 든든히 자리를 잡았다. 정권의 떡고물이 아쉬운 몇몇을 제외한 장삼이사는 대통령을 욕할 때 더 이상 아무 저어함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이렇듯 자기 생각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자유론>에서 “공동체 구성원 중 단 사람만 다른 의견을 표명할 때 다수가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재자가 모두의 입을 막는 것만큼 나쁘다”고 했다. 누군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면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반대하거나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탄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소수의견, 과격한 생각의 표현도 허용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우선 말하는 자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의견에 일말의 진리가 들어 있을 희미한 가능성도 인정한다. 소수의견이라 해서 억압하면 그 일말의 진리가 드러날 기회가 없어지므로, 바보같이 들려도 표현하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표현의 자유는 가능한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한 사회가 치르는 비용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만약 어떤 사람이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선동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명백하고 의도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에 호소해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참과 거짓의 경계에 있거나 해석의 여지가 있다면 무작정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다수가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억압하는 핑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그 주장의 진위를 검증하고 사실임을 입증할 증거와 논변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인데,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 언론은 그 검증을 받아야 할 처지다.

둘째로 표현의 자유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자유를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도 있다. 물론 명확하게 규정된 시간, 장소나 모임에서 표현의 자유를 막아야 할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종교집회에 참석해서 다른 종교를 포교하거나 군대에서 적국을 옹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자유와 억압 이전에 예의와 상식의 문제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는 주장까지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두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래도 억압하고 감금하기보다는 가능한 치료하고 교육하려 애써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땅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쟁취한 표현의 자유를 가장 신나게 누리는 것은 민주화 이전 그 자유를 억압하던 자들과 그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당당하게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옛날처럼 권력자를 욕하면 고문당하던 시절이 좋았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부득불 몇몇은 감옥으로, 몇몇은 병원으로 가야 하겠지만, 이들의 소란스러움을 너무 한탄할 필요는 없다. 당신들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증인이라고, ‘요즘 시절’이 당신들이 그리워하는 그때보다 낫다는 증거라고 찬찬히 가르쳐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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