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수초어록 앞면 표지.
‘동산수초어록’(민족사)은 동산수초 선사의 어록을 번역한 국내 최초의 책이다.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 선사는 중국 오가칠종 가운데 운문종을 개창한 운문선사의 제자이자 ‘마삼근’이라는 화두로 잘 알려진 선승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의 어록 전체를 번역 출간한 적은 없다. ‘임제록’이나 ‘육조단경’ 등은 수없이 많이 번역되고 있지만, ‘동산수초어록’이 번역·출판된 것은 희귀한 일이다.

이 책을 번역한 영곡 스님은 널리 알려진 스님은 아니다. 그러나 번뜩이는 지혜로 선어록을 번역하는 솜씨가 대단하고, 탁월한 해석 능력을 갖추고 있어 앞으로 불교계에서 꼭 주목해야 할 분이다.

현재는 경상남도 통영시 무우사에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선어록을 번역하며 한가한 무사인(無事人)의 삶을 살고 있다. 스님은 주로 지금까지 번역되지 않은 선어록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번역 문장이 매우 매끄럽고 의미도 분명하게 처리하는 점이 영곡 스님 번역본의 강점이다.

저자 동산수초 스님은 중국 오가칠종 가운데 운문종을 개창한 운문선사의 제자이자 ‘마삼근’이라는 화두로 잘 알려진 선승이다. 동산 수초(洞山守初) 스님의 선맥 계보는 이렇다.

‘육조 혜능(六祖慧能)―청원 행사(靑原行思)―석두 희천(石頭希遷)―천황 도오(天皇道悟)-―용담 숭신(龍潭崇信)―덕산 선감(德山宣鑑)―설봉 의존(雪峰義存)―운문 문언(雲門文偃)―동산 수초.’

동산 스님은 910년 봉상부(鳳翔府)의 양원[良原: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숭신현(崇信縣)]의 부씨(傅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이 16살이 되자, 어머니께 출가를 간청했다. 위주[渭州: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공 동으로 가서 지심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는 경주[涇州: 감숙성(甘肅省)]의 율종사찰인 사리율사(舍利律寺)로 가서 정원(淨圓)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출가한 절이 율종에 속하였던 터라 처음에는 율장을 익히는 데 공력을 들였다. 하지만 그다지 흡족한 공부가 아니라고 여겨 행각을 하다가 지금의 광동성 유원현(乳源縣) 북쪽의 운문산에 이르렀다.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후 후한(後漢) 은제(隱帝) 건원(乾祐) 원년(948)에 운문산을 떠나 양양의 동산사(洞山寺)로 가서 40여 년을 주석하였는데, 이때 그 도가 천하에 두루 전해져서 수많은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태평흥국 6년(981)에 상서인 석공(石公)과 양수(襄帥)인 조공(趙公)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동산 스님의 뛰어난 도행을 알리고 아울러 나라를 교화해 성인의 교화를 더욱 두터이 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북송 조정에서는 종혜선사(宗慧禪師)라고 시호를 드리고 자색 가사를 드림으로써 당간의 깃발을 뛰어나게 했다. 아무런 병환도 없다가 송 태종 순화 원년(990) 가을 7월에 결가부좌를 한 채 세수 81세, 법랍은 65하로 원적에 들었다.

역자 영곡 스님은 조계종 수좌(首座, 수행승)로 오랫동안 여름ㆍ겨울철 결제(結制: 석 달간의 집중수행) 때마다 선원에서 안거수행을 하고, 해제(解制) 때는 신도들에게 경전을 강의하거나 번역을 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 왔다. 현재는 경남 통영의 무우사에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선어록을 번역하며 한가한 무사인(無事人)의 길을 걷고 있다.

저서에 ‘항복 기심-참는 연습’, 역서에 ‘정법안장’(전2권), ‘분양무덕선사어록’(전3권)이 있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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