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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설] 게슈타포와 공수처
[삼촌설] 게슈타포와 공수처
  • 설정수 언론인
  • 승인 2019년 12월 02일 18시 05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2월 03일 화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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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죽을 이유가 없어. 즉각 떠나도록 해” “마지막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어요” 에바브르운은 히틀러의 명령을 거절했다. 히틀러는 에바브라운과 같이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첫날 밤을 보낸 다음날 함께 청산가리 알약을 깨물었다. 에바는 곧 쓰러졌고, 동시에 히틀러는 자기 머리에 권총을 쐈다. 인류 역사의 최대 악행의 주범 히틀러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렇게 끝났다.

히틀러의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알로이스 쉬클크루버였다. 히틀러는 유산상속을 위해 ‘쉬클크루버’라는 성을 ‘히틀러’로 바꾸어 히틀러 시조가 됐다. 미술에 소질이 있던 히틀러는 미술학교에 입학시험을 쳤지만 두 번 다 낙방했다. 자신의 그림 실력을 확신하고 있었던 히틀러는 심사위원들의 뒷조사를 했다. 심사위원 7명 중 4명이 유대인이었다. 광분한 히틀러는 유대인 심사위원들에게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그 후 성인이 돼 자신이 짝사랑한 여인의 남자도 유대인이라는 것을 안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져다. 이처럼 유대인을 향한 히틀러의 앙심은 유대인 대학살의 참극 ‘홀로코스트’의 씨앗이 됐다.

30살 때 친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 정치에 입문한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술로 당 중심 인물이 됐다. 당세가 커지자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꿔 나치당의 당수가 됐다. 자신이 쓴 ‘나의 투쟁’이 10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독일 국민을 열광시키고 히틀러는 영웅화 됐다.

1934년 대통령 힌덴부르커가 급사하자 총리였던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총통이 됐다.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르기 시작한 히틀러는 인종청소라는 명분 하에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앙심 정치’를 무자비하게 펼쳤다.

인간 본성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야만의 정치를 하늘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2차 대전의 연전연패로 히틀러 광기의 독재정권 불씨도 꺼져갔던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공수처와 비슷한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로 철옹성 같은 독재정권을 구축했지만 결국 정의의 심판에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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