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기획자(ART89)
김경숙 기획자(ART89)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2012년 개봉되어 누적 관객 수 350만(그 시절엔 대단한)을 차지했던 ‘건축학 개론’이다. 내용을 보면 서연(극중)과 승민이는 대학 1학년 ‘건축학 개론’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되고 점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종강과 함께 사랑은 끝이 나고,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들은 다시 만난다.

영화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시 만난다’라는 그저 그렇고 그런 멜로 영화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는 배우들의 모습, 마음을 울리는 대사, 많은 배경들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기억나는 두 가지 장면과 대사가 있다.

첫눈이 오면, ‘그들의 장소’에서 만나자던 약속과 그 집에서 기다리던 서연이다. 만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풋풋했던 시절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그들은 다시 만나고, 밥을 먹으러 간 매운탕 식당에서 서연이는 승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매운탕, 갈비가 들어가면 갈비탕, 알이 들어가면 알탕, 그런데 매운탕은 그냥 맵다는 뜻이다. 그게 끝이다. 안에 뭐가 들어가도 다 매운탕, 마음에 안 든다. 뭐가 들어간 지도 모르고 맵다고 매운탕, 내가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그냥 맵기만 하네’

겨울이다. ‘첫눈이 왔던 걸까?’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있고… 예전엔 첫눈이 오면 어디어디에서 보자던 친구의 연락이 없어서 눈이 온다는 소식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 같다.


‘잎은 지고 새는 떠나고 차가운 서리 내려
얼어붙은 숲속에서 너는 말했지
겨울은 길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바람으로 털실을 짜서 너의 빈 가지를 덮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지
내가 너의 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 윙윙 소리 내며
빈 가지 사이를 맴돌기만 하지’ - 겨울 황경신

김종언 作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오래전, 핸드폰을 검색하다가 한 그림에 시선이 한참 동안 고정되었던 적이 있다. 김종언 작가이다.

눈 내리는 농촌 들판, 비탈진 계단과 집 사이 가로등 불빛, 눈발 속 자동차 불빛 등 그가 그리는 그림은 뿌옇고, 온통 회색빛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유동하는 대기가 있다.

작가 고향은 경북 봉화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인데, 어린 시절 풍족하지 않았지만 자연과 고향 향수 가득한 그곳을 작가는 온전히 끌어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의 은사이신 이중희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접해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듯이 화가 김종언의 심성은 마치 목화 솜털같이 보드랍고 희다. 그런 흰 바탕의 심성 위에 이루어진 그의 예술 또한 자연의 체취를 진하게 녹여내는 고차원적 세계를 보여준다. 백색 심성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연주의 예술이 극치이고, 논어에서 말하는’회사후소(繪事後素)의 극대화된 화경(畵境)이다.

김종언 作

김종언 그림에는 일단 밝은 태양광이 없고, 화풍 또한 산뜻하지 않다. 보편적인 자연미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가 담고 있는 소재들은 하나같이 ‘자연물’이 아니라 고난도의 자연 속의 <현상적인 것>이다.’

작가는 눈이 오면 어느 곳이든 그곳을 찾아간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다다르면 그리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다고 한다.

‘적막 속 겹겹이 쌓인 집들은 이내 사람들로 보이고 그 표정마저 읽혀진다. 따스하지만, 애잔하다.’ - 밤새. 김종언

김종언 作

겨울이 오면, 흩어졌던 기억들이 다시 모아져 마음으로 저장된다. 초등학교 언제였던가? 방학을 맞아 외가와 고모 집이 있던 청송을 자주 방문을 했었다. 지금은 도로포장이 잘 되어 가는 데 불편함이 없지만, 그 시절엔 울퉁불퉁 흙먼지 나는 시골 길이었다. 더군다나 눈이 오면 차가 다니지 않았다. 울산에서 늦게 청송 터미널에 도착해 큰집 오빠와 어린 마음에도 가도 가도 끝없는 눈길(4km)을 하염없이 걸었다. 도착해서 고모와 사촌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12월. 날씨가 춥고, 삶을 버터 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맵기만’한 세상에서 따뜻한 기억과 마음으로 그들과 만나자.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런 말 한마디 건네어 보자.

‘첫눈이 오면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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