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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어슬녘 귓바퀴가 젖어야
[아침시단] 어슬녘 귓바퀴가 젖어야
  • 손창기
  • 승인 2019년 12월 12일 15시 5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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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소리들은 집이 다 잡아먹는다

맑은 어둠이 내릴 때 집은
큰 범종을 걸어 놓는 걸까, 음관音管이 생긴다
소리의 혀를 내밀어 잡음을 걸러내고
소용돌이치는 공기까지 슬몃슬몃 가라앉힌다

어스름이 냄새와 빛깔까지 잠시 붙잡아둔다
순간, 귀에 익은 소리들
아이들 공차는 소리, 마지막 풀벌레 소리

맑은 소리만 잡아두었다가 내뱉는가
혀가 짧은데 더 멀리 퍼져 나간다
소리에 끌려가는 시간
어릴 적 저녁밥 먹으라는 어머니 소리가,
먼 들판에서 놀아도 흑백사진처럼 들린다

이미 달을 갖고 싶어 하는 시간이므로
돌담집이나 동해 바다나,
달빛 스미는 돌의 외침까지 품고 있는 게다

먼저 귓바퀴가 젖어야
달빛이 물로 변하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을 게다

<감상>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어슬녘에는 공기가 가라앉고 맑은 어둠이 찾아온다. 어릴 적 어머니가 저녁밥 먹으라는 소리에 끌려가는 순간이다. 맑은 어둠이 내릴 때 범종의 울림을 갖는 집의 깊이를 느끼는 순간이다. 범종의 종구(鐘口)에 손을 넣어보면 볼록하게 짧은 혀가 만져지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고 멀리 번진다. 집은 범종처럼 일상의 잡음을 걸러내는 음관(音管)의 역할을 해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먼저 귓바퀴가 젖어 있어야 순수한 아이들의 공차는 소리, 맑은 자연의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달빛이 물로 변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환상에 이르게 된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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