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 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꽂이 한쪽에
낯익고도 낯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세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 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먹활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등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감상>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은 세상에서 이제 새로운 비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이 쓴 시집은 이미 낡은 책이고 책장에서 좀이 쓸고 있다. 은유의 칼을 벼리고 벼리지만 금방 날이 무뎌지고 만다. 세상에 귀 밝고 눈 밝은 사람이 시인이 아닌가. 내가 새롭고 참신하다고 생각한 은유마저 이미 누군가가 써 놓은 것이니, 그 향기는 사라지고 만다.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고 기울어가는 서녘의 책이지만, 언젠가 새로운 은유와 미학으로 동녘 하늘에 파랑을 몰고 오지 않겠는가.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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