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하려는데 처마가 없다

이런 야박한 것들!

지붕도 없는 도회지 빌딩 숲에서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착하고 속 깊은 집 처마 밑에 앉아서
조록조록 낙숫물 듣는 소리

사치스럽게, 오래오래 듣고 싶다



<감상> 처마는 세상과 교감하는 깊은 그늘과 같은 곳이다. 온갖 것을 받아들이는 아늑한 공간이 아닌가. 비가 오면 처마에 떨어지는 가느다란 하얀 비, 굵직한 파뿌리 같은 비, 억수같이 퍼붓는 장맛비를 볼 수 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물봉오리가 일어나는 모습은 또 어떤가. 지붕이 없는 도시의 사막에서 유리문은 모든 것을 차단한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착하고 속 깊은 집이 없으니 처마도 당연히 없다. 햇살을 받아들이고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집, 그 처마 밑에서 조록조록 낙숫물 듣는 소리 오래 듣고 싶다. 비록 가난해도 처마는 마지막으로 깃들 수 있는 마음의 본향(本鄕)같은 곳이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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