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산 ‘주문진 오징어’. H 판매 사이트 캡처
“혼란스럽다.”

진미채 오징어 포장재에 적힌 문구를 본 누리꾼의 한마디다.

포장재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오징어의 본고장 주문진에서 엄선하여 직접 제조한 믿을 수 있는 오징어입니다.”

그런데 바로 아래에 쓰인 원산지 표시는 이렇다. ‘오징어(페루산) 90.04%’.

‘페루산 주문진 오징어’가 인터넷에서 회자하자 다른 누리꾼의 사진이 올라왔는데, 여기엔 ‘제주 갈치(노르웨이산)’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중 국적’의 수산물? 무슨 영문일까.

‘주문진에서 엄선하여 직접 제조한’이라는 홍보 문구 속 수식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원재료는 외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왔을지라도 선별이나 가공 같은 2차 처리를 해당 지역에서 했다면 유명 산지의 이름을 갖다 붙여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현행 제도상 문제가 없다.

오징어나 갈치는 농산물품질관리법상 ‘지리적 표시 등록제’ 대상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루, 노르웨이 등으로 원산지를 밝혔기 때문에 이들 상품이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또 제품이 실제로 해당 지역에 위치한 식품 공장에서 2차 가공을 거쳐 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허위·과대광고로 문제 삼기에도 한계가 있다.

특기할 점은 주문진 오징어나 제주 갈치와 달리 완도 전복, 기장 미역 등은 ‘칠레산 완도 전복’, ‘일본산 기장 미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완도 전복과 기장 미역 등 26개 수산 특산품은 해양수산부에 ‘지리적 표시’를 등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품명에 유명 산지 이름을 마음대로 붙이지 못하도록 보호받는다. 어길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오징어와 갈치는 지리적 표시제로 보호받지 못하는데 전복과 미역은 보호받는다는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사는 어종이냐, 비교적 한정적인 수역에서 나고 자라는 종류냐에 달렸다.

우리나라가 인정하는 지리적 표시는 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 특산물의 맛과 품질에 직접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진다. 지리적 표시제를 먼저 도입한 유럽(EU)의 ‘원산지 명칭 보호’(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PDO) 제도에 가깝다.

완도 바다에서 씨앗이 뿌려져 자란 전복은 완도라는 자연환경이 품질에 미친 좋은 영향을 인정받아 ‘완도에서 자란 전복만 완도 전복으로 부를 수 있다’는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나 갈치는 주문진 앞바다나 제주 연안에서만 나서 자랐다고 보기 힘든 생선이기 때문에 현행 지리적 표시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원료를 외지에서 가지고 왔더라도 생산, 제조나 처리 과정 중 어느 하나라도 지역과 연관이 있으면 ‘지리적 표시 보호’(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PGI) 인증을 주는 EU 등에서도 이동하며 서식하는 비양식 어류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

결론적으로 소비자들은 앞으로도 ‘주문진 오징어’, ‘제주 갈치’라고 표기된 제품을 샀는데 원산지는 한국이 아니었다는 경험을 계속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개선책은 없을까. 제도상 문제가 없을지라도 ‘페루산 주문진 오징어’에 속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푸드비즈니스랩의 문정훈 교수는 EU에서 사용하는 인증제인 ‘전통 특산물 보증’(traditional specialities guaranteed·TSG) 제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주문진에서 오징어를 가공하는 데 쓰는 특별한 기법이 있고, 이를 제품의 강점으로 부각해 팔려고 한다면 당국이 가공법에 관한 구체적 기준과 인증 절차를 마련해 제대로 된 길을 열어 주라는 것이다.

TSG의 대표적 사례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피자가 있다. 서울에서 구워 파는 피자일지라도 EU가 규정한 재료 기준과 요리 방식을 준수하면 ‘나폴리 피자’라고 명명할 수 있게 해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보장한다.

동해안의 오징어 어획량이 급속도로 줄고 있는 상황에서 페루에서 잡아 온 오징어를 주문진 지역 사회가 가진 나름의 노하우를 살려 진미채로 가공했다면 ‘주문진 오징어’라는 이름을 떳떳하게 붙여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가 됐단 이야기다. 단, 여기엔 ‘주문진 오징어’라는 타이틀을 달아줘도 무리가 없을 만큼 까다로운 인증 기준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황태를 생산하는 강원도 덕장 관계자의 말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황태의 본고장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덕장들이 모인 인제용대황태회 최용진 총무는 뉴스와의 통화에서 “동해 수역에서 잡히는 명태는 이제 거의 없고 러시아산이 100%에 가까운 상황에서 원산지 표기는 의미가 없고 건조장 표기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가공) 업체가 러시아산 명태를 중국에서 말려 팔아도 구분이 되지 않다 보니 가격 경쟁에서 밀려 용대 덕장 황태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13%에 불과한 실정”이라며 가공지역 표기 의무화를 주장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지리적 표시제를 관할하는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현행 지리적 표시제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고 제도를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관련 부처 등과 소통하며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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