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삼문 금오공과대학교 외래교수

동양의 고전으로 사마천의『사기』, 우리의 고전으로『삼국사기』,『삼국유사』, 『열하일기』등이 운위되나, 숨어있는 고전을 찾아서 읽는 데는 인색하다. 지난 100년의 제도적인 교육과정이 그러하였고 다른 세계의 물질문명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 문명의 유산을 돌아보는데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길러 왔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맞은 것 같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문집목판과 같이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록 자료들이 남아 전하며, 이들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동국여지승람』에서『여지도서』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사정을 알려주는 방대한 양의 인문지리서들이 있으며, 이러한 관찬 자료 이외에도 보석 같은 사찬 자료들이 숨어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읽으면서 이른바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약 4백 년 전 인재 최현(崔晛·1563~1640)이 편찬한 경북 선산의 인문지리지인『일선지』의 첫 장을 펼치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지리도 10절’이 나온다. 선산지리도에 붙인 10편의 시인데, 선산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선산부사 시절에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점필재의 연보에 따르면, ‘46세인 1476년 7월, 모부인 봉양을 위하여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다.’ 하였으니, 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으로 돌아와 선산의 역사와 문화를 노래하였다.

처음의 시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인 당시까지 선산을 주름잡았던 선산[일선] 김씨와 그 시조 김선궁을 노래하고 있다. 점필재도 그 후손이다.

다음은 선산부의 동쪽 10리에 있는 태조산을 노래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울 때 머문 곳이라고 전해온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도리사를 노래하고 있다. 그 주에 보면, 묵호자가 죽고 난 뒤, 또 아도가 왔으며 아도가 경주에 다녀와서 겨울인데도 복사꽃과 오얏꽃이 핀 곳에 절을 지어 도리사라 하고 이것이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전해온다고 하였다.

네 번째는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친 고을 수령 이득신을 소개하고 있다. 사당을 지어 향사하다가 폐지되었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는 지금도 남아 전하는 ‘선산 죽장리 5층석탑(국보 제130호)’이 자리한 죽장사를 소개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고려 충신 야은 길재(吉再, 1353~1419)를 노래하고 있다.

칠곱 번째는 장원방을 소개하고 있다. 장원방은 선산 영봉리를 말하는데 그 주에서 ‘전가식(田可植), 정지담(鄭之澹), 하위지(河緯地, 1412~1456)가 (과거에서) 장원을 했었다.’고 하였다.

여덟 번째는 야은의 태생지로 전해오는 고아 봉계리에 살았던 열녀 약가(藥加)를 소개하고 있다. 지금 이 곳에는 삼강정려(三綱旌閭, 충신 야은 길재, 효자 배숙기, 열녀 약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3호)가 남아 있다.

아홉 번째는 낙동강의 월파정(月波亭)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주에는 ‘부사가 수로로 오는 일본 사신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낙동강의 보천탄(寶泉灘)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소금배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오늘날까지 대개 그 유적이 전해오는 선산의 인물과 산천을 노래하여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고향 선산을 노래한 점필재는 당시 영남사림의 영수로, 시문에 능한 문장가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이 드높다. 점필재는 외가가 있던 밀양에서 태어났기에 밀양에 예림서원이 있으며, 그 종가는 고령에 있다. 처가가 있던 김천에도 자주 드나들었기에 김천에서도 그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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