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유승민 의원이 이끄는 새로운 보수당이 한국당과의 보수 통합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무슨 심오한 말씀인가 했더니, 뜻밖에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 보수 진영의 의원들 중 대다수가 찬성하고 몇몇은 반대했던 일에 대해 서로 잘잘못을 따지지 말자는 뜻이다. 그냥 “탄핵은 없었던 일로 하고 잊자”고 하면 되는데, 나름 시적으로 표현했다.

정치인들의 빈약한 기억력이나 강력한 뻔뻔함을 감안하면 그들이 탄핵을 잊는 것은 쉬워 보인다. 또 공동의 경쟁 상대를 이기기 위한 보수연합을 구축하려면 가장 민감한 이슈를 피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들의 필요와 편리에 따른 제안이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탄핵에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탄핵에 찬성했는데,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것은 그 사실을 무효로 돌리자는 말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정권을 운영했던 자들에게 과연 탄핵을 잊을 자유가 있는가? 누구 맘대로 탄핵의 강을 건너는가?

본인들이 잊는다 해서 국민들이 잊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끼리 탄핵의 강을 건너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은 묻는다. 탄핵에 찬성했다면, 자신의 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을 스스로 쫓아낸 이유가 무엇이며, 지금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반대했다면, 당시 대통령의 탈법적인 행동들이 정당했고, 탄핵에 찬성했던 국민들과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부당했다고 보는 것인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정치인들은 이 물음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그 결론을 국민 앞에 제출해야 한다.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인 사건에 대해 정치인으로 마땅히 자신의 판단에 책임을 지고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다시 표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권위주의적 행태요 주권자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말은 언뜻 고상해 보이지만, 과거 어느 독재자가 눈을 부릅뜨며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하던 협박과 다를 바 없다.

선거는 경쟁하는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이룬 업적, 현재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입장, 미래를 향한 정책과 비전을 공개하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구하는 과정이다. 보수진영은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들이 선거에 이기면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 약속한다. 그런데 그 현재와 미래의 바탕이 되는 과거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야기를 피하면서 유권자들도 함께 잊어주길 바라는 눈치다. 그러나 과거를 잊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자들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강 건너 가자는 한가한 말보다는 차라리 탄핵이 부당했다는 우리공화당 조원진 의원의 외침이 훨씬 더 책임 있게 들린다.

탄핵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은 최소한의 시작일 뿐이다. 보수진영의 정치인들은 탄핵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에 대한 물음에도 답해야 한다. 탄핵 이전 여당 의원과 내각의 일원 등으로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최순실의 행패를 정말 몰랐는지, 기업만이 살길이라는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이 기업에게 억지로 돈을 뜯어낸 정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가 안보를 중히 여기는 보수정당으로서 외국인 말(馬) 장사치와 기(氣)치료 아줌마 같은 이들이 국가 중요시설인 청와대를 검문도 없이 마구 들락거린 사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등에 대해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은 적이 없다. 탄핵의 강은 물살이 세다. 애써 노를 저어도 힘들 것인데 입질로 건너가겠다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대충 건너가려다 아주 침몰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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