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오가는 말에 감정 쌓여 가정폭력·이혼 유발
전문가들 "도 넘은 관심 대신 적당한 거리두기" 강조

설을 3일 앞둔 22일 포항시 남구 상대동 해바라기숲어린이집 원아들이 설날 세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은성 기자 sky@kyongbuk.com
직장인 최모(35·여)씨는 이번 설 연휴에 대해 기대감보다 부담감이 더욱 크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덕담을 나누는 게 즐거웠지만, 요즘 들어 친척 어른들이 인사처럼 내뱉는 ‘결혼은 언제쯤 하니. 올해는 시집가야지’, ‘선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 등의 말을 듣게 될 때마다 귀를 막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명절 ‘덕담’은 이미 ‘악담’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최씨는 “명절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며 “회사업무 등을 핑계로 친척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전부”라고 푸념했다.

민족의 명절 설이다. 가족의 만남은 언제나 반갑고 친근하다.

하지만 해마다 명절이면 ‘도 넘은’ 친밀함이 싫어, 명절을 피하고 싶은 ‘명절증후군’ 환자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명절증후군이란 장시간 운전을 하거나 고된 가사 노동에 따른 신체적 피로·성 차별적 대우·취업이나 결혼에 대한 잔소리 등으로 우울증·불안·무기력증 등 정신적 질환이 유발되는 것을 뜻한다. 신체적 증상으로는 척추·관절 질환이나 두통·소화불량 등이 있다.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은 주부·미혼자·취준생 등 다양하다.

차례·손님 대접·상차림 준비를 비롯해 결혼 시기와 취업 성공 여부를 묻는 질문 등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돌이킬 수 없는 불화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족 모임이 ‘갈등의 장’이 된다는 것은 통계로 입증된다.

실제로 설·추석 명절 연휴에는 평소보다 1.5배가량 많은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22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설·추석부터 지난해 설까지 명절 연휴기간 동안 신고된 가정폭력 사건은 하루 평균 1024건이었다.

이는 지난 4년간 발생한 일평균 가정폭력 신고 건수(708건)보다 44.9% 많은 셈이다.

지난해 설날 연휴 닷새 동안 접수된 가정폭력 사건은 전국에서 4771건으로 일 평균 954건이 발생했다.

또 명절 직후엔 이혼 신청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해 설이 포함된 2월에 접수된 협의이혼신청 건수는 9945건에서, 3월엔 1만753건으로 증가했다.

지난 2018년 역시 설이 포함된 2월 8880건에서 3월엔 1만1116건으로 증가했으며, 추석이 포함된 9월 9056건에서 10월에는 1만2124건으로 증가하는 등 같은 추세가 계속됐다.

이렇듯 명절이 갈등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전문가들은 ‘소통’만큼이나 ‘거리 두기’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평소에 자주 만나지 않던 사람들이 단시간에 친해지려고 관심을 기울이려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른 가족 구성원 간 갈등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남녀 성 갈등의 경우 ‘역할 바꿔보기’를, 정치적 갈등은 ‘대화 소재 제한하기’ 등의 규칙을 정하는 방법이 갈등 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행복한 가정연구소 관계자는 “명절 전 가족들이 카카오톡 등을 통해 한 대화방에서 ‘할 얘기’와 ‘못할 얘기’를 나누는 걸 추천한다”며 “명절 전 미리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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