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 물길·십리 백사장 맞닿은 푸른 솔숲서 신선이 되어볼까

사색을 즐기려 온 한 관광객이 송림을 거닐고 있다.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 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 년 수령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백금의 모래 빛이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듯 끝없이 펼쳐지고 울창한 숲과 모래밭은 수줍은 남녀가 경계하듯 다름에 서로의 미를 받쳐주고 있다.

선비의 정신이 오롯이 새겨진 곳, 신선이 쉬어가는 풍광을 가진 곳이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 일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9호다.

백송리는 옛날 예천군 위라 면의 작은 성(지성·枝城)이었던 백송은 입향조가 마을을 개척할 때 흰 소나무가 있었다고 ‘흰소리, 흰 쇠리, 백송’ 등으로 불렸다.

입향조는 바로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굉이다. 입향조의 아들은 내성천과 우암산이 부딪치는 절벽에 정자를 지어 학문을 닦고 풍류를 즐겼다. 맑은 물과 소나무 숲, 절벽이 어우러져 신선이 노닐었다는 이 선몽대를 배경으로 많은 학자가 배출됐다. 진성 이 씨 입향조가 마을에 뿌리를 내린 이후 많은 인물과 박사들이 나와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빼어난 산수에 걸출한 인물이 어우러진 마을이다.
 

선몽대의 송림은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 막이 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풍수상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물길 등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 및 비보 림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선몽대 숲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 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 년 수령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 막이 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풍수상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물길 등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 및 비보 림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22일 오후 강바람이 볼을 때리고 심술이 난 구름이 해를 가려 어깨가 좁아지는 쌀쌀한 날씨다.

선몽대로 가는 송림길은 짙은 솔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드넓은 백사장이 시원함을 전해주고 따듯한 한잔의 진한 커피가 그립다.

선몽대 일원은 하늘이 내린 선경이 뭔지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던 곳이며, 강과 함께 숨 쉬어온 역사문화 지리서의 중요한 한 장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내성천의 강물과 10리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선몽대와 숲과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선몽대숲은 은행나무길이 끝나면 다시 울창한 가로수 길로 이어진다. 이방인을 낯설어하는 마을에서부터 내성천으로 향하는 개울과 정성 들여 갈아놓은 골짜기의 밭 사이에 길은 운치가 그득하다.

청량한 그늘이 끝나면 문이 활짝 열리듯 내성천 물길과 십 리에 이른다는 백사장과 빼어난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넓은 것은 낮고 높은 것은 그윽해 평온함과 적막함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선대동천(仙臺洞天),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송림에는 두 개의 비(碑)가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단순한 각자의 완벽한 설명이다. 송림이 끝날 무렵 우암의 기념비가 있고, 멀지 않은 천변에 선몽대가 보인다. 선몽대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있다.

선몽대에서 약 5km 상류에 있는 고평교와 그 아래 형호교 일대에서는 강에 펼쳐진 거대한 모래톱이 유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또는 계절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고 있다 10여 년 전 만해도 드넓은 백사장이 형성돼 있었지만 지금은 영주 댐 등으로 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모래톱이 곳곳에 형성돼 백사장이 줄어들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모래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원을 세웠는데, 강모래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은 에너지라고 말하는 기의 흐름을 잘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성천에는 이산서원이 있고 중류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한 약포 정탁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이 있다. 또 하류에는 용궁 학교가 옛 향기를 느끼게 한다.

소나무숲은 천변을 따라 150m 정도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허한 북풍의 기운을 막아준다. 언젠가 제방을 쌓으면서 나무줄기가 상당한 깊이로 묻혔다고 한다. 줄기 부분이 흙에 묻히면 나무뿌리와 줄기는 숨을 쉬지 못하고 끝내는 말라 죽는다. 이곳의 몇몇 나무들은 밑동 주위에 자연석을 두르고 얕은 못처럼 파 놓았다. 숨 쉬시라는, 오래 사시라는 배려다. 쉬이 보기 어려운 굵은 줄기와 거북 등 같은 수피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무들의 시간을 가늠케 한다.
 

선몽대 정자에서 한 관광객이 내성천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선몽대

선몽대는 1563년(조선 명종 18) 퇴계 이황의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세운 정자이다.

우암은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가 1563년, 그가 26세 때다. 퇴계는 직접 선몽대 현판과 시를 써서 종손자에게 보냈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우암은 백송에 돌아온 이후 농사짓고 후학을 기르며 선몽대에서 노닐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의 널따란 백사장이 내다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진경산수화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선몽대 정자 앞으로는 내성천이 흐르고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지고 있다. 수배견 된 소나무들이 이방인의 발길을 잡으며 쉬어가라 재촉하 듯 강바람을 포근하게 막아주고 있다.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선몽대는 선경을 이룰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이황의 친필 편액과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새겨진 시판이 걸려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동제가 열리며, 선인들의 자취가 깃들어 있는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2006년 11월 16일 명승 제19호로 지정됐다. 예천군과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몽대 일대는 기러기가 내성천에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형상이라 해서 풍수학적으로는 ‘평사낙안 형’(平沙落雁 形)이라 전한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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