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코로나19가 휘젓고 있는 대구, 경북의 현실이 참 팍팍합니다. “염병(染病)하네~”가 왜 큰 욕인지 비로소 알겠습니다. 저 같은 유한(有閑)의 중늙은이도 견디기가 힘든데 한참 일자리를 찾을 젊은이나 현장의 소상공인, 그리고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겪는 경제적 심리적 손실과 고통은 얼마나 클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이 ‘염병할’ 현실을 한꺼번에 뒤집어엎을 ‘마법사의 돌’이 나타나 잃어버린 일상을 하루빨리 되찾아 올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효과적인 치료약과 백신이 속히 만들어져 코로나19도 또 하나의 ‘호환(虎患) 마마(천연두)’ 이야기가 되어 전설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들이 지구 위에서 살면서 하루도 걱정 근심 없이 살아온 때가 없었습니다. 양식 구하기, 천적 피하기, 염병 넘기기, 질병 견디기, 서로 싸우기, 혼자여서 괴로워하기 등등, 산다는 게 곧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만약 그것들이 일제히 몰려든다면 살아남을 인간종족은 아예 없을 것입니다. 두어 개 정도만 합쳐도(전쟁과 역병 등) 인류는 큰 생존위기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대개의 경우 하나씩 찾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개중 하나가 기승을 부리면 다른 것들은 다소 숨을 죽이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는 것의 어려움’을 견디는 인류 나름의 노하우도 하나씩 축적되어 왔습니다.

인류가 천생(天生)의 어려움들을 견디는 한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딴 세상 찾기, 즉 ‘다른 시간관념 가지기’입니다. 흔히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공간, 4차원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 안에서 삽니다. 그 공간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지면 당연히 그것을 뛰어넘을 이런저런 궁리를 하게 되어 있지요. 그럴 때 ‘다른 시간’에 대한 요구가 자연스럽게 대두됩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건너뛰거나, 현실의 인과관계(시간의 선후)와는 전혀 다른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새로운 공간을 찾게 됩니다. 아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마법의 공간이나 어른들 무협지에 나오는 강호(江湖)가 그런 곳이지요. 사실 아이들은 그런 마법의 공간이 아니더라도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늦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무데도 없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도대체 너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니?”라고 물을 때 아이가 “아무 것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공간이란 의미와 가치를 가질 때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도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자’라는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대외 활동의 축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외 활동의 축소는 내가 가진 의미 있는 공간의 축소나 부재를 초래합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자’라는 캠페인은 그러니까 “나는 아무 곳에도 없는 존재이다.”라는 것을 매일매일 자각하고 인정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렇게 서로 접촉을 자제해야만 치명적인 염병의 발호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시간을 다루는 ‘마법사의 돌’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시간관념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내 한 몸을 잘 보전해야(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염병이 사라지고난 뒤 일말의 훼손됨도 없이 현실로 바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TV 염병 특집을 끄고 FM라디오 음악의 세계로 침잠해도 좋고, 평소 보고 싶었던 명화(名畵) 감상을 해도 좋습니다. 여유가 좀더 있으면 몇 권의 책을 선택해서 오랜만에 차분하게 독서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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