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자의반 타의반, 글 쓰는 일이 평생의 업(業)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 마음먹고 글을 쓴 것이(백일장 출전)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니 제 글쓰기 인생이 반세기를 넘겼습니다. 그것이 복(福)인지 화(禍)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명료하게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동안의 업무가 신통한 것도 미련한 것도 아닌 그저 범박한 평균치를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평균치 인생에서 되돌아보았을 때 살면서 아는 경지는 대체로 셋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미 나면서부터 아는 경지, 살면서 하나씩 배워나가는 경지,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모르는 경지, 그 셋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우둔한 제 경험도 그러니 공자가 말한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학지, 곤이불학의 비교는 이른바 ‘글공부 하는 자’의 계급을 정확히 나눈 것이라 하겠습니다.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오, (배우긴 하지만) 막힘이 있으면서도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니라.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구제불능의) 하등이 된다”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아마도 저는 학이지지와 곤이학지의 중간쯤에서 평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저의 처지에 만족합니다. 생이(生而)도 아니고 곤이(困而)도 아니면서 그럭저럭(애쓰며) 살아온 날들이 대견스러울 때도 가끔씩 있습니다. 모르던 것을 어렵게 깨치는 즐거움이 학이(學而)들에게는 꽤나 큰 복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역 책에서 본 ‘암말의 곧음이 이롭다’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주역 2장 중지곤(重地坤)의 첫 구절은 “곤은 크게 형통하고, 암말의 곧음이 이로우니(坤元亨 利牝馬之貞)”입니다. 앞장(제1장) 건(乾)편에서는 주로 용(잠룡, 현룡, 비룡, 항룡)을 이야기합니다만 제2장에서는 암말(牝馬)을 이야기합니다. 건이 하늘이고 곤(坤)이 땅인지라 그 각각에 속하는 대표 동물을 들어 우주의 이치를 설파한 것 같습니다. 용은 하늘, 말은 땅을 대표하는 동물 상징입니다. 말 중에서도 암말이니 더 땅과 가까운 느낌을 줍니다. 대지(大地)와 모성(母性)은 자고로 친연성이 강합니다. 주역에서는 암말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그 둘을 하나로 묶어냅니다. 우선 ‘암말의 곧음이 이롭다’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곤의 곧음이 이로운 바는 암말에 이롭다. 말은 땅에서 다니는 것이고 또 암컷으로 순함이 지극하니, 지극히 유순한 후에 형통하므로 오직 암말이 곧아야 이롭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39쪽)

주역의 첫 장에서는 ‘마침’을 강조합니다. 욕심내어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고 공존의 윤리 속에서 제대로 마무리할 것을 강조합니다(亢龍有悔). 둘째 장에서는 ‘순함’을 강조합니다. 반듯하게 자신의 삶을 제도(濟度)할 것을 권면합니다. 각자가 사납게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암말’이라는 상징적 표현이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 상징의 힘입니다. 그 그림이 내 무의식에 투영되면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서적인 에너지가 분출합니다. 그냥 “순하고 반듯하게 인생을 영위해라, 그러면 너와 너의 가족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암말의 곧음이 이롭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는 말씀입니다. 주역의 말씀이 종종 논어의 말씀을 종복처럼 부리는 까닭도 바로 상징의 힘 때문입니다. 주역 읽기가 읽기 인생의 최종 종착역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요. 모든 배움은 결국 자기에서 출발해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도상(途上)의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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