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민 편안한 마음의 고향 숲길

포항 송도숲의 아름드리 소나무.

‘조선 순종4년(1910), 동양척식회사 소속 오오우치 지로(大內次郞)가 농사를 짓고 과자를 팔며 살고 있었는데 1911년 송도 백사장 53여 정보(16만평)를 대여받아 나무를 심기 시작해 울창한 숲을 만들었다. 이 숲은 1929년 어부보안림(魚附保安林)으로 지정됐고 광복 후에 더 많은 나무를 심어서 포항의 대표적 방풍림이 되었다.’ (‘일월향지’ 1967)

포항시민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했을 송도. 송도는 영일만이라는 동해안 최고의 자연조건 덕분에 명사십리 백사장을 가진 해수욕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길게 펼쳐진 솔밭으로 인해 포항시민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였다.

1968년도 송도.

처음부터 송도로 불렸던 건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는 영일현 읍내면 송정리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이 됐다. 지금과는 형산강 물길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송도는 당시 섬이 아니었다. 강 하구가 그렇듯 형산강의 수량이 많으면 섬이 되기도 했다. 1931년 형산강 개수공사를 시작하면서는 형산강 물길도 바뀌고 송도의 모양도 변하게 됐다. 그리고 1938년, ‘향도동’이라 불렀고 포항읍에 속했다. ‘향도’란 ‘저 건너 섬’이란 뜻으로 동빈동이나 남빈동에서 보면 저 건너에 있는 섬이었다. 해수욕장 이름도 향도 해수욕장으로 당시 기록에 나온다. 송도라고 불린 것은 광복 이후이다.

황포돛대를 타고 건너가던 송도에 다리가 처음 생긴 것은 1934년이다. 현재 오거리에서 송도로 이어지는 길이 예전부터 있던 큰길인데, 지금의 송도교와 같은 위치에 나무다리로 만들어졌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산업이 발전했고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 동해안에 많이 잡히던 청어와 정어리를 가공하는 공장이 들어섰다. 송도에 조선소가 세워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미 포항항(현재의 포항구항)은 개항을 한 이후였다.

1930년대 정어리잡이는 절정을 이루었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1937년의 정어리 어획고는 138만8215t이었다. 동해안 일대의 항구마다 어유(魚油) 저장 탱크가 세워지고 정어리 공장들이 들어섰다. 정어리기름은 선박용 연료, 화장품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고 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어박 : 魚粕)는 사료 또는 비료로 쓰였다.

포항 송도에도 60~70평 규모의 함석으로 된 정어리공장이 있었으나 환경개선사업 일환으로 이후 철거됐다. 정어리기름 저장탱크는 최근까지 있었다.

동빈큰다리 건너 북쪽, 요트계류장이 생기고 포항함을 옮겨다 체험관으로 만들 때까지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없어졌다. 지름 약 7m, 높이 약 5.5m의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물인 저장탱크 외벽에는 6·25전쟁 시 생긴 총탄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어 송도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중요한 유산임에도 사라지고 말았다.

2011년 포항시에서 의뢰한 용역조사 ‘포항 근대문화유산 활용방안 연구’에서도 저장탱크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송도 솔밭 등과 연계 개발해 관광 및 교육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1987년도 송도

1930년대 만들어져 송도와 함께해 온 저장 탱크가 있던 자리엔 지금은 글램핑장이 들어서 있다. 송도는 형산강 하구의 퇴적지라는 천혜의 조건으로 염전 또한 유명했다. 송도의 북쪽 마을을 아래 각단이라 불렀는데, 아래 각단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염전이 많아서 이 지역을 소금 굽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염동골이라 했다.

송도 하면 떠올리게 되는 해수욕장은 1931년에 개장했다. 포항읍으로 승격된 해이기도 하다. 원산해수욕장과 더불어 송도해수욕장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광복 후에도 포항송도해수욕장은 전국 각처에서 많은 해수욕객이 찾았다. 하지만 1968년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해수욕장은 바뀌어 갔다.

그 넓던 백사장은 유실됐고 끊임없이 환경문제가 대두됐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해수욕장의 쇠락과 더불어 송도 솔밭 또한 많이 훼손됐다. 솔밭 사이로 아스팔트 길이 생기고 고층 아파트단지까지 들어섰다.

옛 사진을 통해 영일만을 낀 포항의 전경을 살펴보면, 방풍림의 송도 솔밭의 기능이 확인되고 낮고 길게 조성된 솔밭의 편안함이 백사장 건너 바다와 참 잘 어울렸다.

하지만 고층 아파트단지가 들어섬으로 이제 그런 조망은 볼 수 없게 됐다.

사실 해안도로를 타고 동해안 바닷길을 달려보면 전망 좋은 곳에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올라간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마치 좋은 전망을 독점하겠다는 욕심으로 보여 불편할 때가 많다.

포항 송도숲의 설치 조형물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해 바다 전망대신 바다를 가리는 인공적인 그 건물을 바라봐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편함은 송도 솔밭을 정비한 모습에서도 계속된다. 보도블록을 깔고 조형물을 설치해야만 솔밭이 공원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게다가 바닷가 솔밭에 인공 실개천과 물레방아는 송도의 특색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송도 솔밭을 살리기 위한 문화적인 접근과 생태적인 접근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찍이 화가 이창연은 송도를 그렸고 작가 안성용은 송도를 사진으로 남겼다. 2018년부터 포항문화재단에서 기획한 ‘포항거리예술축제’는 해안을 낀 송도 솔밭에서 이루어지는 축제이다. 사실 마을숲이 전통 유희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송도 솔밭 또한 포항시민들에겐 축제의 장인 경우가 많았다.

포항개항제 때 미스포항 카퍼레이드에서부터 해변 노래자랑도 어김없이 송도에서 이뤄졌고 사생대회, 백일장 등의 단골 장소였다. 학창시절 송도 솔밭으로 소풍 안 가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공연 예술의 공간이 시공관(훗날 시민회관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중앙아트홀이 됏다)밖에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포항 송도는 시민들에게 축제와 문화의 장이었다. ‘포항거리예술축제’는 송도 솔밭에 그런 놀이 공간의 기능을 다시 불러낸 셈이다.

(사)경북생명의숲은 2019년부터 송도 솔밭을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해 소나무 낙엽이 썩어 생긴 부엽토를 긁어 제거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소나무는 상록수인데 낙엽이 있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늘 푸른 소나무지만 낙엽은 있다. 다만 활엽수들처럼 한꺼번에 낙엽으로 떨어지지 않아서 늘 푸르게 보일 뿐이다. 소나무 낙엽들은 페놀이나 탄닌 성분이 많아 다른 식물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지만 낙엽이 썩어 생긴 부엽토는 소나무와 공생관계에 있는 균근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

버섯이 자라지 못하면 결국 소나무 뿌리도 약해지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공원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송도 솔밭을 가꾸는 활동을 시작했는데, 포스코를 비롯 여러 회사의 기업봉사팀과 중·고등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개인 봉사자까지 1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숲을 이용하는 즐거움을 넘어 숲을 가꾸는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고무적이다.



보물섬을 들어봤으리라. 어릴 적 보물지도를 꿈꿔도 보았을 테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일까. 연재한 글들은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숲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쾌적한 생태적 환경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거대 자본으로 자리할 수 있다.

건강한 숲 가꾸기를 위한 일종의 문화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숲이 보물이다. 숲으로 가는 길은 보물을 찾아가는 길이다.

‘경북의 숲’ 연재가 저마다의 보물을 찾는 여정에 지도가 됐기를 바란다.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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