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는 반란군을 피해 수도 장안을 버리고 강도로 도망쳤다. 도망자 신세이면서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버리지 못했다. 10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주지육림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에도 마음에 스며드는 공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가는 목을 누군가가 칼로 베기 위해 들이닥치겠지”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세상이란 참 신기하게도 잘 만들어졌어. 괴로움과 즐거움, 귀인과 천인처럼 교대로 순서가 돌아온단 말이야” 뜬금없는 말도 자주 내뱉었다.

결국 수양제를 지키던 병사들이 난을 일으켰다. 쿠데타 주모자는 고구려 침략 때 사령관 우문술의 장남 우문화급이었다. 반란군에게 끌려 나온 수양제는 반란군 지휘관을 향해 호통쳤다. “짐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폐하께서는 선조의 묘가 있는 수도를 버리고 사방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힘겨워 했지만 폐하께서는 도적들이 들끓는 와중에도 아첨꾼들의 말만 듣고 백성들 목소리는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수양제는 지휘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나는 백성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너희 들은 높은 지위를 얻고 많은 녹봉을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신분이지 않느냐. 대체 주모자가 누구냐.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주모자입니다. 누구라고 꼭 집어 한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 지휘관의 대답이었다.

수양제의 죄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묵살한 죄였던 것이다. 수양제는 남북조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군주였지만 백성의 목소리를 외면한 고집불통이 몰락을 자초했다. 반란군이 수양제의 목을 베려 하자 수양제는 “천자만의 죽는 방법이 있다”며 목도리를 건네주면서 목을 조르도록 했다.

당 고조 이연은 수양제에게 ‘양제(煬帝)’라는 시호를 정해주었다. ‘양(煬)’이란 시호에는 ‘예를 등져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란 뜻이 숨어 있다. 탈원전 재난, 경제 폭망, 개방 방역에 의한 코로나19 확산 등 ‘3재(三災)’를 자초한 대통령이 수양제를 떠올리게 한다. 총선에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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