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대구는 산성과 토성의 고장이다. 고대 군사 요충지였다는 사실이다. 삼국시대부터 방어와 보호를 목적으로 생긴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하여도 20여 군데나 된다.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덜 알려진 산성과 토성도 있다.

평소 궁금하게 여긴 것이 있다. 대구와 관련된 고문선 중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고운 최치원(857~908 이후)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수창은 대구의 전신인 수성이다. 알려진 내용으로는 대구 앞산 대덕산 정상의 산성에 누각을 세우고 최치원의 기문이 후삼국시대까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팔각등루기’에 따르면 당시 대구의 호족 이재가 신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호국성에 팔각등루를 짓고 동화사스님 및 여러 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던 사실이다. 이 누각의 최치원이 남긴 기문에 나오는 첫 문장을 적어본다.

“천우 5년 무진 908년 겨울 10월 호국 의영도장 중알찬 이재가 남령에 팔각등루를 세웠다.” (중략) “이 성의 서쪽에는 불좌라는 둑이 있고, 동남쪽으로 불체못, 동쪽에는 천왕이라는 못이 있다. 땅에는 오직 성이 있는데 이것은 달불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산을 불이라 한다.” 여기서 달불성은 달성토성이고 불산은 성불산인 앞산이 된다. 최근까지도 앞산의 정상에 위치한 대덕산성을 호국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덧붙여 “드디어 높은 언덕을 택하여 그곳에 성을 쌓았다. 강물 위에 우뚝 선 성은 끊어진 절벽과 같고 험한 산을 등지고 우뚝한 것은 구름처럼 길다. 서쪽에 있는 도성을 안정시키며…” 에서는 앞산의 용두토성이 호국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 대덕산성과 용두토성은 평소에 가끔씩 가는 곳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검단토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현장 답사를 하였다. 금호강 절벽 위에 자리한 검단 토성은 천혜의 요새로 원삼국시대의 토성이다. 성의 둘레는 1,8km 높이 70m에서 90m이고 동쪽은 자연절벽과 강물, 남쪽과 북쪽은 구릉능선을 따라 토성으로 이루어졌다.

최치원,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부분

만일 여기에 중알찬 이재가 누각을 세우고 그의 부탁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지식인 최치원이 지은 기문이 있다고 상상해본다. 얼마나 운치 있는 대구의 자랑일까? 지금까지 남아있는 최치원의 글씨흔적은 경남 하동 쌍계사에 있다. 887년에 쓴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의 전액 대전 서체와 비문의 해서로 유추할 수 있다. 문장의 대가이자 서법의 대가답다. 아마 호국성 팔각등루 기문의 글씨체는 당나라시대 서예 4대가 중 구양순과 우세남의 필법을 변용한 최치원 서체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신라의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빈공과에 응시하였고 규칙에 따라 당 4대가의 서체를 배워야 했다. 획이 곧고 멋이 있는 필의 로 세심한 감정을 소유한 신라 지식인의 필체였을 것이다. 기필(획의 시작)과 수필(맺는 부분)이 단정하여 힘차고 기품 있는 장법(구성)을 구사한 해서체라고 생각된다.

최치원은 52세에 여기 팔각등루기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그는 신선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여하간 통일 신라의 대표 지식인 최치원이 대구에 남긴 글귀였다는 것만 하여도 엄청난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의미가 있고 확실하니 이참에 우리지역에 대단한 스토리를 하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호국의 고장 대구경북에 최치원이 명문으로 당시 대구의 여러 정황과 호국에 관한 위대한 유산을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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