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맹자』의 「공손추편」에 천시, 지리, 인화라는 동양학의 3대 법칙이 존재한다. 천시(天時)는 타이밍으로 지리만 못하고, 땅의 유리함인 지리(地利)는 사람의 조화로움인 인화(人和)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개인과 단체를 넘어 국가경영에서의 인화의 중요성은 더욱 중요하다. 사주팔자에도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응용해 천원(天元), 지원(地元), 인원(人元)지장 간의 이론인 삼원사상을 송대에 정립했다.

이순신의 천시는 을사년 경진월 경오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출생지와 성장지는 서울 건천동(현 중구 충무로 부근)이다. 이곳은 이순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과 같은 동네이다.『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 따르면 류성룡, 이순신, 원균, 허균의 형 허봉은 모두 같은 서울 건천동 출신이다. 한편, 이순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5살 많은 원균(1540~1597)이 한동네 출신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특히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란 당시 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과의 인연은 이순신의 운명에 있어서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관계인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서애는 이순신의 둘째 형인 요신과 친구 사이로 이순신보다 3살 터울의 동네 형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는 나이 차가 나도 허물없이 지낸다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관계를 유지했던 시절이다. 예컨대 이 당시 코믹 에피소드로 어린이 동화집의 단골 메뉴로 인구에 회자되는 ‘오성과 한음’의 관계도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1556~1618)과 한음 이덕형(156 ~1613)은 다섯 살 터울의 우정을 나눈 관계였다. 또한 조선후기 북학파의 비조로 평가받는 담헌 홍대용(173∼1783)과 연암 박지원(1737~1805)도 6살 터울이지만 평생 동지이자 친구로 만났다. 요즘 같이 학번이나 학교 기수의 차로 선후배로 구분하는 인간관계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꿈이야기가 40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 4회가 류성룡에 관한 꿈이다. 또한 많은 서신 가운데 류성룡에 관한 서신이 약 15회 정도 등장할 만큼 서애가 충무공에게 준 영향력은 지대하다. 백척간두의 조선을 구한 두 위대한 인물의 인연은 본인과 나라를 구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1542년 11월 17일(음력 10월 1일) 새벽 진시(辰時)경 풍산류씨로 관찰사를 역임한 류중영과 안동김씨 진사 김광수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둘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형은 겸암 류운룡이다. 현재도 하회에는 겸암의 양진당과 서애의 충효당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21세 때인 1562년, 서애는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을 때 퇴계가 첫 만남에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실질적으로『조선왕조실록』에도 책을 읽을 때 한번 눈을 스치면 훤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의 총명한 인물로 평가된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류성룡은 정치·경제·군사 전략가로 활약했지만,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로 호파의 학봉과 더불어 병파의 거두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경세가로서의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의 학맥은 상주의 우복 정경세(1563~1633), 창석 이준(1560~1635) 등이 계승했고, 우복의 학맥은 서애의 3남 수암 류진-류세명-류후장-박손경-입재 정종로-류심춘-류후조-류주목 등이 계승해 현재에 이르렀다.

서애가 임란전에 한산대첩의 이순신과 행주대첩의 권율을 천거한 것은 신의 한수로 평가된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했을 때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면서 합천 초계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이후 진주 손경례 집에서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임명교지를 받았다. 이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 그러나 정유년은 2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4월에 모친도 돌아가셨고, 10월에 막내 아들 면도 세상을 떠나고 만 한해였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은 2차 부산포해전, 어란포해전, 벽파진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1598년 무술년에 조명수군은 7월 절이도해전(고흥 거금도부근)과 9월 장도해전(왜교성전투)를 승리했다. 이후 임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이순신은 순국하고 임란 6년간 백척간두의 조선을 책임졌던 류성룡도 북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한 해가 무술년 1598년으로, 이순신과 서애 류성룡은 1598년 무술년 11월 19일 운명의 괘를 같이했다. 무술년은 조선도 울고 백성도 운 한해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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