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요즈음 자주 수성교 옆 방천시장에 간다. 몇 개의 갤러리가 생겼기도 하고 아직도 인간미 넘치는 선술집의 막걸리가 생각나면 시장 안 이곳저곳에서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린다.

이곳은 필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파편이 묻혀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장 입구 상주한의원 2층 건물의 모습은 사라지고 시장안도 도심재생이라는 명분으로 인하여 많이 바뀌었다. ‘상주한의원’ 이름을 떠올리면 옛 생각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날에는 김광석이라는 대구 출신 대중가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오간다. 허나 나에겐 소헌 김만호라는 스승님의 자취가 더 어른거린다. 방천시장은 나에게 상주한의원에 거주하신 소헌 선생의 이미지로 덧씌워져 있다.

약 50년 전 이야기다. 1970년대 초 모든 것이 물질과 빠름보다는 느리지만 인정으로 살던 시간과 공간이었다. 어린 필자는 어머니와 함께 떡과 청주를 손에 들고 방천시장 입구의 김만호 선생이 주재하시던 상주한의원을 찾았다. 이유인즉, 소헌 선생께서 지도하신 봉강서도회에 입문하여 서예와 한학을 지도받고자 한 첫 문안 허락 방문이었다.

큰절을 올렸다. “관향이 어딘 고” “그리고 이름은 뭣인고” “예, 성은 광산 김 씨이고 이름은 진, 자 혁, 자입니다.” 첫 만남의 대화였다. “허!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는 김가라고 해야 한다. 잘 알겠느냐.” 자신을 상대방에게 낮추어야 한다는 유가적 예법에 관한 첫 지도이셨다. 이 한마디가 소헌(素軒·본래 소박한 집) 선생의 삶에 대한 지표를 보여주신 필자에 대한 첫 말씀으로 아직도 생생하다.

1980년 필자개인전 방명록에 소헌 김만호 선생의 휘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더욱 더 각인되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느낄 것이리라. “글씨는 써보았느냐? 지금 한 번 써보아라.” 안진경의 쌍학명 비문 첫 구절을 임서하여 보여드렸다. “음, 서예의 기초공부는 어느 정도 되어있구나, 오늘부터는 근례비문을 임서 하도록 하여라.” 그 날부터 서예의 기초수련이 시작되었다.

한의원 입구의 자그마한 서실 공간에는 묵향이 넘쳤다. 옆방에는 한지에 쌓인 한약재가 매어달려 한약내음과 먹 냄새가 섞여서 오묘한 오리엔탈의 향기와 분위기가 나왔다. 몇 년 후 한국미술협회 주최의 한국서예공모전에 입선하였다. 당대 명필 구양순의 황보탄비를 임서한 것이었다. 십대 중반의 청소년이 일반 작가들의 공모전에 당선된 것에 소헌 선생 이하 봉강서실의 가족들은 기뻐하였다. 그럴수록 더욱 더 낮추고 열심히 하라고 훈도해주셨다.

미술대학에 입학하자 이제 성년이므로 아호를 내려 주셨다. “너는 끈기가 있고 재주가 많으니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여 배울 학(學), 산등성이 강(岡), 학강 이라고 호를 주셨다. 평생학습의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같이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크게 되어라 는 뜻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후 여러 공모전에 수상하게 되어 시상금으로 개인전시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9년 고려화랑에서 현대회화의 단색화 작업 30여 점으로, 1980년에는 이목화랑에서 서예작품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광개토지평안호태왕비 필의 등 30여 점을 선보였다. 소헌 선생께서는 불편하신 몸으로도 직접 나오시어 ‘장관(壯觀)’이라고 방명록에 휘호하셨다. 제자의 전시회에 축하해주시며 격려를 주시었다. 선생께서 강조하신 왕희지가 말한 비인부전(非人不傳·인간이 안 된 사람을 가르쳐선 안 된다)과 정관자득(靜觀自得·사물을 조용히 관찰하여 스스로 깨우쳐라) 이라는 말씀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겸손과 덕으로 일상을 살면서 섬기라고 항상 말씀하신 울림이 귓전을 울리는 오월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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