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1989)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62회 아카데미상 각본상 수상작입니다.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에도 후보작으로 올랐던 명화입니다. 영화는 1959년 버몬트의 개신교계 귀족풍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반교육적인 상황을 고발합니다(작가의 학창시절 경험이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건강한 시민을 기르기보다는 출세주의의 가시적 성과를 올리기에 급급한 학교 당국과 ‘카프페 디엠(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을 외치는 한 영어 교사와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대립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크게 공명을 일으킨 영화 내용입니다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크게 흥행되지 못한 영화입니다. 아마 우리사회의 한 특수한 성격, 즉 입시교육에 철저히 침윤된 초중등교육과, 그것에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게 하는 어떤 강압적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역사의 발전으로 어렵게 ‘시민사회’를 추구해 온 미국을 위시한 서양 근대사회에서는 명실공히 시민교육이 학교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입니다. 사회의 자격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학교의 핵심 역할인 것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의 활동 공간인 직장, 지역사회, 국가, 지구촌 전체의 시민으로서 정치, 사회, 문화, 생태 등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성실한 직업인), 그때그때 해야 하는 의사결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질을 길러주는 것이 학교에서 하는 시민교육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그해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 수를 학교별로 교문 앞에 내다 거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그런 짓은 반시민교육적 행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쪽에서는 고교 교사의 학생 추천서가 대학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도 대학입시에서 학생부 평가를 실시합니다만 교사의 학생 평가를 그들처럼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얼마 전 한 신문 기사에 “볼 것이 없어서(비교과영역에서는) 결국 교과성적을 볼 수밖에 없다”라는 대학 입시담당자의 인터뷰가 실린 것도 본 적이 있으니까요.


오늘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제목에 기대어 ‘죽은 시민의 사회’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우리 사회의 한 불구성에 대한 제 나름의 소견입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지 115년(을사조약),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이 두 사건이 ‘시민사회’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등 이른바 본격적인 ‘시민 정부’가 수립된 기간도 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로도 시민사회의 진면목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그야말로 시민사회의 대두라는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시민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심사숙고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직업 소명의식과 책임윤리에 철저하고,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시대착오적인 반시민사회적 행태들이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퇴행적인 보수 언론과 일부 권력기관들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의 발전적 방향에 중요한 좌표를 제시하던 진보계열의 시민단체들도 우리 사회의 발 빠른 발전에 제대로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친일파, 토착 왜구’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정치적 진영논리를 강화하는 행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디서든 상처에 머무르는 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대처입니다. 분노와 증오로 해결책을 찾는 것은 늘 실패합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되새겨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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