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바람의 소리(風聲·The Message)』(진국부·고군서, 2009)라는 중국영화가 있습니다. 1942년,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했을 때, 한 특정 공간 안에서 벌어졌던, 생사를 건 고도의 심리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허수아비로 내세운 중국 지도자들이 연이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반일조직의 리더인 ‘권총’의 소행으로 알려지지만 그의 종적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일본군 수사책임자 타케다 중좌는 과거의 일(아버지의 자살)로 겁쟁이 가문 출신이라는 모욕감을 털어내고자 자신이 직접 ‘권총’을 잡아서 사태를 진압하겠다고 공언하게 됩니다. 먼저 ‘권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유령’이라는 첩자를 잡아내기 위해 가짜 암호를 내보냅니다. 그리고 그 암호에 접근할 수 있었던 5명의 내부요원들(암호해독부장 ‘리닝위(女)’, 암호전달원 ‘샤오멍(女)’, 반공산당 대대장 ‘우쯔궈’. 군기처장 ‘진썽훠’, 사령총관 ’바이샤오녠’)을 외딴 별장에 감금합니다. ‘유령’은 가짜 암호에 속지 말 것을 ‘권총’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타케다는 그들을 겁박하고 이간질하고 고문합니다. 영화는 그들 감금당한 다섯 명의 요원들과 일본 정보부측의 막전막후, 물고 물리는 진흙탕 싸움을 그려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불편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만 일본의 침략에 상처투성이의 역사를 지니게 된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그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이되었습니다. 불편했던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냥하고 착하고 예쁜 여자 주인공들의 영웅적 희생도 그 영화를 두 번 보기 힘들게 했습니다. 자기들끼리도 ‘권총’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끝까지 그를 지키려고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바쳐서 결연히 맞서는 그들의 용기와 절개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했을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을까, 아니면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고자 굴복하고 말았을까. 저 잔혹한 고문의 고통 앞에서 과연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이라는 게 가능이나 했겠는가.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 아픈 장면들에 내장되어 있던 ‘비밀의 언어’들이 영화 후반부에 가서 하나씩 그 정체를 드러낼 때 또 한 번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희생시켜 큰 대의를 구했던 주인공들의 비장한 각오가 낱낱이 드러나고 마지막으로 무리한 수사의 책임을 지고 재판을 받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되는 타케다를 뒤쫓아 가서 귀향선을 기다리며 무심히 앉아있는 그의 목에 치명적인 자상을 내고 사라지는 ‘권총’(우대장)을 보면서 대리보상을 얻기도 합니다. 오래된 빚 문서를 들고 가서 빌려준 돈을 받아오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반전의 묘미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의 반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참혹한 세월을 견디고 다시 찾은 것이 고작 ‘평온한 일상’이었다는 마지막 메시지도 큰 반전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로 된 나라가 서고, 살아남은 두 남녀주인공은 각자의 자리에서 수수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치파오(죽은 ‘유령’이 기워준 여자의 옷) 한 장을 보는 것이 마지막 반전입니다. 한 땀 한 땀 모르스부호로 기워져 있는 그것에 남긴 ‘유령’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무정함을 용서하세요, 민족이 존망에 이르러 몸을 던져 만일의 순간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몸은 없어져도 영혼은 영원히 그대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적들은 모르겠지요, 권총과 유령, 그들은 사람이 아닌 정신력과 신앙이라는 것을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의 이유를 모를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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