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성으로 '역경 승화'…남다른 고향·자연 사랑 화풍에

최종모

최종모의 소개는 ‘포항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사서(史書)에 간단히 기록돼 있다.

“1950년대에 동경미대 출신의 서창환과 김우조, 배원복 등이 구상화 계열의 서양화와 한국화의 최종모가 주축이 돼 그룹전을 개최하거나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최종모 등은 포항을 떠나갔기 때문에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이어지는 향토미술사와 제대로 밀착되지 못했다”라고 언급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지역 화단의 여명기인 1950년대 최종모가 몇 안 되는 미술가 중에서 한국화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역 화단 형성에 선각자적인 위치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최종모는 포항 출신으로 지금의 청하중학교 전신인 1952~1959년도 해아농업고등학교(海阿農業高等學校) 설립과 함께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왔다. 이후 여의치 않아 해아농업고등학교 교단을 떠나게 됐고 대구·경북지역에서 평교사로 근무하면서 우리 지역 화단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그는 생전 22회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56년 1회 개인전(포항 중앙초등학교)을 시작으로, 1977년(포항서경도서관), 1984년(일월문화제 초대전), 1985년(남화랑 개관기념전)을 개최했다. 이것은 1950년대~70년대 공백기나 다름이 없었던 지역 화단에 최종모의 활동으로 맥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최종모는 한국전쟁 때 해군으로 참전해 부상(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음)을 당한 1년 뒤 제대했다. 교육에 대한 이론이나 연구가 전무했던 시절에 최종모는 애국하는 심정으로 낙낙장송 뻗어있는 넓은 솔밭에 매료돼 1952년 청하에 해아농업고등학교(현 청하중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그러나 경영적 서투름으로 인해 1959년 운영재단이 교체되면서 최종모는 포항지역을 떠나게 된다. 이후 1969부터 1985까지 대구·경북 일대에 공립학교 평교사로 근무하며 교육자와 작가로서 살아갔다. 최종모는 청하중학교를 떠나 많은 세월 동안 실의에 빠진 나날들을 보냈다. 또한 6·25 때 지뢰에 한쪽 다리를 잃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큰 아픔을 견디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을 위하기 앞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함을 깨닫고 자신만의 수업을 위해 그림에 정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청하중학교 설립 전부터 틈틈이 그림을 그려왔고, 어릴 적부터 그림에 대한 열정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최종모 작 偈

최종모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서양화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다. 첫 개인전과 두 번째 개인전시에 유화 작품을 선보였던 것을 보면, 아마도 일본의 어느 소도시에서 중등교육(1940년 일본의 다다양중학교에 다녔다)을 받으면서 신 미술을 접하게 돼 유화작품으로 보여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생에 대한 재인식을 시작하면서 평생을 수묵화로 전향하게 된다. 그의 수묵화의 전향은 자연주의와 ‘無’의 개념에 따라 노자가 말하고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통한 내면적인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자아의 존재가치를 찾으려는 동양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는 꾸미려 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과 동화되는 美를 찾으려는 몸짓을 평생의 작품의 화두로 삼아왔다.

최종모의 예술은 자연을 향한, 자연으로 비롯된 조형적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소재는 철저한 현장 사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화폭 속에서 평면과 공간성의 관계, 색채와 형태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작품성을 좀 더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주제를 단순한 묘사적 재현이 아니라 내재된 이미지의 변형과 특징,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를 작가의 자유로운 개성으로 표현해 내적·외적인 자연의 물상과 이미지를 또 다른 형상으로 표현해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담한 구도와 다원적인 시각으로 미술평론가들에게 많은 호평과 관심을 가지게 했고, 작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게 됐다.

최종모 작 激

이러한 독창성을 정점식(1917~2009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은 ‘우리들은 개인전에서 구색으로 모아둔 여러 계열의 작품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잡화상과 같은 기이한 인상을 줄 때가 많다. 최종모씨의 경우에는 이런 상업성이 없고 자기가 당면한 모티브에 집착하고 그것과 결투하고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화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강인하고 견고한 골법(소묘)을 택하고 있는 것은 이 작가의 회화 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고된 작업에 대해서 위로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라고 평가했다.

‘예술은 나의 심상의 표현이다. 내 것이 없는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예술은 공산품을 만드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어떤 물상을 만드는 재주가 예술일 수 없다. 그것은 기(技)이며, 예(藝)는 아니다. 예에는 반드시 작가의 사상이나 의식이 담겨 있어야 하며 그 의식은 몽땅 작가의 것이어야 하고 순수 무구해야 질 높은 예술에 근접할 수 있다’라고 예술의 본질을 주장했다. 이러한 작가정신은 자기연마와 현장의 사생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연과 합일을 염두에 둔 성실성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남다른 고향 사랑이 늘 가슴 한 켠 그리움이 남아있어, 틈만 나면 영일만을 사생하면서 자신의 역경을 그림으로 승화했다. 모든 것을 털어 버리기에 넓디넓은 바다만큼 좋은 것이 없고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기에 역동적인 영일만의 풍경이 최종모에게는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대 초, 당시 회화인구 3~5여명 정도에 그쳤던 지역 화단의 상황에서 최총모의 부재는 전통회화가 쇠퇴하는 시기가 지속됐다. 그러나 최종모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우리 지역을 떠났지만 평생 작업해온 그가 남긴 수묵화 작품들은 거의 영일만의 풍경이고 고스란히 우리 지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가 영일만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또한 1950년대~1970년대의 그의 개인전은 공백기나 다름없었던 지역 미술사에 맥을 잇게 했고, 교육설립자로서의 업적들은 선각자적인 인물이다.

선진 지역에서는 선배들이 남긴 작품에 대해 알기 위한 노력과 조사연구, 그리고 홍보에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또한 그것들로 인해 문화예술의 도시로서 위상을 획득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인들은 물론 지역민들은 수묵화가 최종모를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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