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천 경운대학교 벽강중앙도서관장 교수
한태천 경운대학교 벽강중앙도서관장 교수

‘근위노공(謹慰勞功)’. 이 말은 공직생활을 반년쯤 했던 1985년 6월 말, 직장 대선배님의 퇴임식장에서 친목회장이 송별사에서 한 말이다.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명예로운 정년퇴직에 이르렀음을 축하하며 위로하는 말이다. 전율을 느꼈고 가슴 깊이 간직한 참으로 매력적인 말이었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지난 6월 말, 나 자신이 ‘공로연수자’라는 이름으로 퇴임식장의 주인공이 되어 후배로부터 ‘근위노공(謹慰勞功)’이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

나에게 지금 ‘근위노공(謹慰勞功)’이라는 위로의 말이 적합한가? 내 앞에 놓여진 ‘철밥통, 혈세 낭비, 무노동 무임금, 국민정서 외면’이라는 ‘제도적 비난’의 수사들. 퇴직하는 날까지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지만, 막상 퇴직기에 이르러서는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하기 싫은 공로연수를 신청해야 했다. 그리고 공로연수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인들로부터 ‘철밥통에 무노동 무임금으로 혈세를 축내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오늘의 내 위치. 평생을 국민만 바라보며 충실하게 근무한 나와 나의 동료 공무원들에게 누가 이런 ‘제도적 비난’의 덫을 씌웠는가? 이 제도를 고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선택권조차도 없는 선량한 공무원들만 비난받게 하는가!

지난 7월 1일 자로 전국에 수천 명의 공무원이 공로연수에 들어갔다. 공로연수제도는 1993년 평생을 공직에 봉사하며 살아온 공무원으로 하여금 퇴직 후 남은 생을 위하여 사회적응 연습을 하는 기간을 주자는 취지에서 6개월에서 1년 근무 기간이 남은 공직자를 대상으로 시행한 제도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공무원 공로연수제도를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사회적 대합의에 어긋나는 제도, 국민 혈세를 축내는 제도, 선후배가 자리를 물려주고 받는 공정거래를 위반한 제도,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 제도, 헌법이 보장한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로연수를 마치고 퇴직한 공무원들은 공로연수제도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공직 출신자의 자긍심을 완전히 짓밟아 놓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무원도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다. 그런데 같은 노동자이면서 공무원은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와는 달리 공로연수라는 제도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공로연수 기간 지급되는 월급이 합법적이라고 하더라도 무노동 무임금제도의 사회적 대원칙에 반하는 것이 맞다. 최저임금을 두고 다투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로연수 기간에 지급되는 월급은 국민 혈세를 무노동자에게 특혜 지급하는 것이 맞다. 공로연수를 택하는 것은 후배들의 승진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불공정 거래가 맞다. 2019년 6월 한 여론조사기관이 국민을 대상으로 국회의원 무노동 무임금원칙 제도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조사 응답자 80%가 국회의원도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국민의 정서다. 공무원도 예외일 수는 없다. 공로연수라는 이름으로 일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특혜를 누리는 것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공무원 공로연수제도는 헌법상 평등 원칙에 반하는 것이 맞다.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공직을 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로연수라는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국민에 대한 차별이며, 헌법상 평등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급에 따라 공로연수 기간이 다른 것은 조직 내부에서의 또 하나의 차별이다. 승진 자리의 한계 등으로 하위 직급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공직자에게 차등적 연수기간은 그들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제도다. 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주어지는 공로연수제는 헌법이 보장한 평등 원리에 반하는 제도가 맞다.

또한, 공무원 공로연수제도는 본인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년퇴직 때까지 일을 하고 싶어도, 승진을 기다리는 후배들의 눈치가 보여 공로연수에 응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무노동 무임금으로 세금 축내는 사람’으로 비난을 받아도 항변할 수도 없다. 내부적으로는 후배의 눈치를 살피고, 외부적으로는 비난을 받게 되는 이 상황을 국민은 알고 있을까? 공직에 봉임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내 자존심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국민들은 알고 있을까?

경상남도에서 공무원 공로연수제도를 개선하여 공로연수자가 공직 생활에서 쌓은 개인의 역량과 전문지식을 다양한 지역개발사업 참여와 자원봉사 활동, 멘토 활동 등으로 유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공로연수자들이 지역사회개발에 참여할 분야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원봉사나 멘토의 역할도 연수자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공로연수제의 폐지가 답이다. 다행히도 충청남도가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도공무원에 대해 2022년부터 공무원 공로연수 의무 제도를 전면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2021년도에는 직급에 따라 다른 공로연수 기간을 6개월로 통일하여 시행한 후 2022년부터 완전 폐지한다는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하면 위안이 된다.

늘어날 평균 수명을 따지면, 공로연수에 들어간 나와 나의 동료들은 이제 겨우 인생의 반을 살았다. 공로연수 1년이 무슨 의미가 있나. 평생을 국민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와 나의 동료 그리고 나의 후배들의 자존심에 더 이상 상처를 주지 말라. 위정자들은 하루빨리 공무원 공로연수제도를 폐지하여 공직자들이 퇴임식장에서 후배들의 ‘근위노공(謹慰勞功)’이라는 위로의 인사를 받고 평생을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 존경받는 공직 퇴직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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