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풍경화 '관념산수화풍' 주종…지역 초기 미술사 기둥 역할

배원복

필자가 큐레이터 업무를 진행해 오면서 평소 아카이브 자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틈틈이 우리지역 미술사와 관련된 자료와 인물이 있으면 성실하게 기록하고 수집하고 있었다. 2015년 11월 16일 배원복 선생(이후:배원복)과 짧은 만남을 약속한 날이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날이었다. 배원복이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 외출을 일절 삼가신다는 말을 들은 것도 있었고, 연세도 고령(당시 92세)이신지라 곧 겨울도 오고 해서 바쁘지만 마음먹고 찾아뵈었다. 그동안 배원복과의 만남은 전시개막 행사에 정중히 인사만 드리는 것이 전부이었고 그의 그림과 삶에 대해서 들어 본 적도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아쉽게도 이 글이 배원복을 지역민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리는 글이 되어 버렸다 .

배원복은 포항시 흥해면 옥성동 88번지에 태어나셨다. 장두건, 장석수, 서창환, 최종모 등의 근대 초기 작가들은 외부지역에서 활동하거나 이적하여 갔기 때문에 지역을 지키는 1세대 원로 미술가로서는 배원복이 유일한 인물이었다. 1987년 포항미술협회 창립에 역할을 하였고, 지역 화단을 지키며 후배와 제자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셨다. 비록, 교직에 몸을 두고 있어 왕성한 활동은 없었지만 존재 차체만으로도 지역 화단에서 버팀목이 되었다.
 

배원복 작품

지역출신 장두건, 장석수는 일본과 프랑스(장두건)에서 유학을 마치고 신 미술을 접하게 되면서 20세기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발자취를 남긴 것에 비해, 배원복은 국내예술학교(경주예술학교,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졸업한 후, 경주에서 교사직을 거친 것 외에 줄곧 우리지역을 지키며 살아왔다.

배원복의 화업은 오랫동안 지역에서 교직 생활로 인하여 작품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생전, 청포도다방을 비롯하여 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미비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할 수가 없었다. 배원복과 만남이 있는 날 자료 보기를 희망했으나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창고 속의 많은 물건을 보여줄 만큼 체력과 의지가 보이질 않으셔서 이루지 못했다. 다만, 1990년대 흥해 체육관에서 모 기관이 후원한 개인전시 도록만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뵙게 될 때 다른 자료를 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몇 개월 후에, 작고하셔서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김천고보 시절과 서라벌예술대학교 시절에 찍은 인물사진 각 1장, 그리고 경주예술학교 졸업장 이미지만 확보하였다. “김천고보 시절에는 왜놈과 함께 공부했는데 너무 고생을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혹독한 추위에 연료가 없어서 송탄유(솔가지로 만든 기름)를 가지러 추풍령까지 가지러 갔었다는 기억과, 6·25 전쟁으로 인하여 10회, 12회와 같이 졸업을 했다 라는 말씀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격동기에 숱한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풀어 내었다.
 

배원복 대학교 시절

배원복은 착실하고 건실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흥해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여, 대구고보를 시험 보려고 하니 그 시절에는 흥해가 시골이라 해서 받아 주지를 안 했다고 했다. 김천고보를 졸업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유명한 교육감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다. 대구사범대학교에 시험 쳤지만 낙방하고, 손일봉이 스승으로 계시는 경주예술학교 1회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진학하여 경북 수채화가인 이수창, 김인수와 동문으로 함께 공부했다. “학창시절에는 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고 많이 그렸어, 그 시절에는 자식이 그림 그리는 것을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는데, 우리집 부모님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원해 주시고 자식의 의지를 많이 응원해 주셨어. 그래서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지” 라고 말씀하셨다.

배원복 경주예술학교 졸업 증명서

대학교 졸업 후 경주 문화중·고등학교에서 8여년을 근무했었고, 이후 포항동지중학교에 8여년을 근무하였다. 이즈음 대동중·고등학교가 분리되는 시점에 대동중학교 교장으로 이직하여 20여년을 보냈다. 거의 40여년을 교직 생활을 보내면서 수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고 4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 활동을 많이 하고 싶었지만 그림에 열중한 모습이 학부모님께 불성실한 모습으로 보여 질까봐 많이 억제 해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나의 작품은 야외 풍경화가 거의 없고 대부분 정물화가 많다는 말씀을 하였다. 서양화를 전공 하였지만 실내에서 작업하다 보니 냄새와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수묵화로 점차 변화해 왔다. 그래서 나의 작품은 한국화이지만 여러 가지 색채가 가미가 되고, 수묵으로 정물화를 그렸지만 서양화의 이미지도 보여 진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야외 스케치가 불가능하다 보니 마음속에 있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심상의 산수화 즉, 관념 산수화풍의 작품을 주로 제작하셨다.

배원복 작, 정물 연도미상

1970년대~80년대의 작품들은 이때만 해도 그의 작품들은 구도, 색채, 소재면에서 창작의 의욕이 돋보여진다. ‘정물-아리랑 담배’의 작품에서는 리드미컬한 터치의 과감함과 시원함이 돋보이고, ‘비상-새’의 작품은 재료적인 면과 회화의 실험적인 요소도 보여 진다. 빠르고 거친 유채의 붓 터치와 구도 감각에서 스승인 손일봉 선생의 영향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교직 생활은 하고 있었지만, 자유로운 창작자로서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199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실험성의 맛은 없어지고 다소 답습적이고 관념적인 정물, 산수화 작업으로 수묵화와 정물화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아마도 엄격한 규율 속에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많지 않은 작업의 양과 자유롭지 못한 창작의 환경에서 나오는 결과라 추측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자료들의 축적은 미래 세대에게는 등불이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된다. 배원복이 작고한 후, 그가 경주예술학교 졸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2018년 경주미술협회에서는 근대화가들의 조명전으로 작품 몇 점이 전시가 되었었다. 우리지역은 근대작가 1세대에 대한 배려와 조명 의지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1950년대~1960년대에 지역 초기 미술사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모두가 떠나버린 상황에서, 배원복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한 가정의 아버지를 대하듯 안정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크다. 비록, 예술적 성과는 교육자의 열정에 묻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존재는 우리 지역에 기둥이 되어 주었기에 그는 소중한 인물로 평가 되어져야 한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