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지금은 서른 살 청년이 된 집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비디오테잎을 빌리러 가면 자기도 따라가서 자기 것을 하나씩 챙겼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드래곤볼>을 빌려왔습니다. TV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는 아이를 수시로 뒤로 당기면서 부지불식 그 내용을 염탐하게 되었습니다. 좀 특이한 게 주인공 손오공의 아버지 이름도 손오반이고, 아들 이름도 손오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코흘리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이 어떻게 똑같냐?” 그러자 아들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대답했습니다.

“원래 그래요!” 아이는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건다는 투였습니다. 시작부터 그랬는데, 왜 자기에게 트집이냐는 거였습니다. 백보 양보해도 이건 만화가 아닌가? 이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인데 그런 이름짓기 하나를 두고 시비 걸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유전되는 게 또 인생 아니겠는가? 아이의 대답이 그런 상식에 속할 자문자답을 불러왔습니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속인(俗人)으로 살다 보면 ‘원래 그런 것’들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간과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도 그랬습니다. 연애의 리얼리즘을 화면 속에서 보기 싫어했던 것은 명백히 저의 ‘연애 콤플렉스’ 탓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그런 염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능숙하지(자연스럽지) 못했던(못했다고 자책하는) 연애 기억에 대한 회피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느낌입니다.

‘원래 그런 것’에 대한 직시(直視)가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절감케 해 준 영화가 <리틀 포레스트>(모리 준이치, 2014)입니다. 우리 영화로도 리메이크된 작품입니다(임순례 감독, 김태희 류준열 주연). 성년기에 접어든(우리식으로는 대입 수능시험이 끝난 뒤) 한 소녀가 시골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기록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마다 7종의 음식 만들기가 시전(始展)됩니다.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무렵에 나온 영환데(원작은 만화) 시골에서 혼자 사는 일상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유행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혼자되자 자신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남편의 고향으로 귀촌합니다. 아이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자 그런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이가 고향에 뿌리를 내릴 무렵 홀연히 아이 곁을 떠납니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서 다시 도회로 나갑니다.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된, 그리고 혼자 남겨진 영화의 주인공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과 감사함을 절로 알게 됩니다. 어머니로부터 어깨너머로 전수 받은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그녀의 손길이 사뭇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겁니다. 그런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었기에 만화에서 영화로 옮겨졌고 또 이웃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과 감사함을 실감나게 전이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원래 그런 것’들 중 하나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네 편의 영화인가? 마지막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 이 네 편의 영화 주인공들이 제 안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로티즘도, 예술에 대한 동경도, 복수심도, 희생과 헌신도, 자연의 품 안에서 혼자서 자립하는 미숙한 자아도, 모두 제 안에서 저의 자기 동일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낯익고 이쁘고 살가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것들이 어찌 제 주인공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네 편의 영화 이야기를 제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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