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이가 들면서 책 읽는 재미가 좀 달라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젊을 때는 새로이 알게 되는 것들이 좋았습니다. “진리 그 자체가 구원이다”라는 말을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릅니다. 그런 ‘신선한 진리의 만남’보다 ‘낯익은 감동과의 재회’ 쪽에 관심이 더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다 보면 제 안에 벌써부터 들어와 있는 반가운 것들을 자주 만납니다. 예전에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때도 종종 있습니다. 다음 구절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 사물들로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사물에 대한 때 묻지 않은 앎이라고 부른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오, 성마른 위선자들이여, 음탕한 자들이여! 너희들의 갈망은 순진무구하지 못하다. 너희들이 그 갈망을 비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렷다! 진정, 너희들이 창조하는 자, 생식하는 자, 생성을 기뻐하는 자들로서 이 대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순진무구란 것은 어디에 있는가? 생식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 그런 사람이야말로 더없이 순수한 의지를 갖고 있는 자다.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중에서]


니체의 말도 재미있고, 그 말을 나무라는 정진홍 선생의 말도 재미있습니다. 저에게는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이중적 성격으로 이해됩니다. 욕망을 내던지는 것도 순진무구고 욕망에 충실한 것도 순진무구입니다. 어쨌든 인생에서 ‘가지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순진무구’가 아닐까싶습니다. 언젠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화폐 무용론’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돈(화폐)’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조그마한 이익을 다투어 풍속이 나날이 각박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벼슬아치의 탐내는 습관을 징계할 수 없게 하는 일뿐이지 않은가?”라고 다산 선생은 말합니다. 돈의 효용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처음 그 대목을 읽었을 때에는 그저 실소만 나왔습니다. 이런 대책 없는 ‘순진무구’가 있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우매한 논리 일색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돈이 없다면 과연 하루라도 일상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산 선생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돈의 법’과 ‘돈의 이로움’을 모르고도 잘 살아왔다고 강변합니다.

오래 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 제목을 보면서(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다산 선생의 화폐무용론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그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던 이유 중의 일부는 다산 선생의 말씀과 연관이 있을 듯도 했습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돈의 횡포로부터 잠시 몸을 피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반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몹시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할 때 그것을 애써 무시하려 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고자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그것을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복수감(復讐感)을 뜻하는 말.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 F.W.니체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강조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상상의 복수로 갚는 인종(忍從)과 관용의 모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이라고 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제 인생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오랜 투쟁이었습니다. 나이도 나이니만큼 돈, 사랑, 권력, 명예 등, 제게 ‘순진무구’를 강요했던 것들에 대한 마지막 총공격을 준비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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