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하고 농익은 향토적 색채 소탈함과 자연스러움 즐겨

조희수

1983년, 조희수 선생(이하 조희수)은 마땅한 전시장이 없어서 손수 임시 화랑(포항오리정 화랑)을 꾸며(벽면에 흰색 한지를 바르고 정돈함) 개인전을 열었다. 필자가 20세 때의 초반 나이에 포항 오거리에서 조희수 전시회를 도우면서 윤경열, 박기태, 박재호 등 경북지역 원로 문화예술인들을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보았던 작품 하나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1981년 작 ‘양지마을’이라는 작품이다. 따뜻한 5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지는 한옥의 툇마루에, 작은 소녀가 힘없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다. 1950년대 후반 당시 누구나가 겪고 있던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기고 있는 시기에, 팔다리가 가는 그 소녀는 배고픔에는 익숙한 듯 관람자의 시선과 마주한다. 소녀의 눈빛은 배고픔으로 생기를 잃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맑은 눈망울만 더 커 보이는 순수한 눈빛을 보여준다. 당시 소녀의 애틋함과 그 시절의 생활상을 설명해 주시던 조희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상당히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그 작품에 대한 인상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인상은 조희수의 인생 전반에 흐르는 예술세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초기작품의 소재는 서민들이 사는 환경을 주로 그렸는데, 옐로우 색채를 띠는 향토적 색채로 가난한 이들의 심리를 그만의 화법으로 따뜻함을 표현했다. 이 소녀가 그려진 화풍에도 짙은 갈색과 옐로우가 깊이 있게 표현되어 졌고 화폭 오른쪽 하단에는 한 줄기 햇빛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소녀의 밝은 미래가 있기를 소망하지 않았을까?
 

조희수 인물사진

조희수는 월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경주예술학교 첫 졸업생으로서 현재, 경북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근대미술가이다. 1950년대 이후 한국미술은 서구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태동과 함께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기울던 시기였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희수는 여섯 번째 개인전, 국전 11회의 입선과 한국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자생적 단체인 ‘목우회’에 출품하여 꿋꿋하게 사실화를 고수하여 왔다. 경상북도지회장과 한국미협 이사와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경북지역 미술문화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는 경북문화상을 수상을 받게 되는 영광도 가지게 했다. 포항에서는 1988년(수화랑), 1991년(아솜터갤러리) 개인전을 개최했고 1987년 포항미술협회(초대지부장 역임)결성에도 힘썼다.

계림스케치 1966년작

젊은 시절 조희수는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작업을 했다. 1980년대 초반, 여식(女息)이 포항 환여초등학교에 첫 발령됨에 따라 10여 년간 포항에 정착하게 되면서, 서울지역 제도권의 미술문화의 흐름을 우리 지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요즈음은 국·공립미술관과 사립미술관, 그리고 각종 아트페어, 상설전시장 등 미술가가 성장할 수 있는 제도권 문화가 다양한 반면, 1949년부터 1990년대의 한국화단은 경제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고 특별한 이력이 없는 작가들은 대한민국미술대전(일명;국전)과 공모전이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조희수는 1954년부터 1977년까지 국전과, 목우회공모전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진 작가이다. 그는 경북지역에서 국전의 입상 경력이 최다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다. 이러한 경험과 체험은 1980년대 경북 화단에서는 ‘공모전’이라는 제도권 미술문화가 생소했던 상황에서 권위 있는 국전 수상작가인 조희수의 존재는 후진 작가들에게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이러한 일면들은 공모전에 출품하는 분위기 붐 형성과 함께 작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기여하게 됐으며, 경북 미술문화 발전에도 상당히 작용됐다.
 

양지마을 - 1981.7 작

조희수는 거칠고 고난의 시대에 자신의 정해진 운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한 사람의 운명의 시간을 들추어보면 번민과 고뇌가 없을 수 없겠지만 조희수 역시 격동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가난한 환경 탓에 화가가 되기 위하여 남보다 곱절이나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43년 고교시절 학급에서 전시회가 있었는데, 천장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 큰 화폭에 그의 재능을 담아 보인 작품을 출품했다. 그 시절 너무나 가난하여 물감을 구하지 못해 당시 버려진 건전지 속에 있는 흑연으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은 화가가 되기 위한 집념이 대단했다고 엿 볼 수 있으며, 젊은 시절 직장생활과 작업을 병행하며 국전에 11회의 입선이라는 놀라운 이력을 쌓았다.
 

장리석,김용기 선생님과 함께

조희수의 화풍에 영향을 끼친 이는 경주예술학교의 스승이신 손일봉과 장리석이다. 조희수의 초기작(1950년대)은 판자촌 등 빈민한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색채는 어두운 갈색 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전쟁 직후 힘든 생활에서 느껴지는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장리석의 화풍의 느낌이 많이 보인다. 중기(1960년대~1980년대)에는 왕성한 작업량과 어느 정도 생활 안정으로 인하여 풍부하고 농익은 다양한 색채와 안정감 있는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화면 전면에는 향토색이 주류를 이루지만, 화사하고 다양한 색채의 배합으로 유화의 단단하고 두터운 깊이를 자아낸다. 또한 정교하고 섬세한 붓 터치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돋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국전에 많이 출품하고 입상한 때였으며 조희수의 화풍이 꽃을 피울 때이다. 후기(1990년대~)는 지금까지의 답습에 의한 화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희수의 작품들은 소탈함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따뜻함이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아주 작은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아마도 자연이 주는 순수함에서 문명에 길들여진 인간은 방해가 되는 요소로 작용 됐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풍경이지만, 사람이 사는 터전과 자연을 그렸기에, 간접적으로 그 속에 따스한 인간미를 느끼게 해준다.
 

괘릉 무인상(미국 박동선 소장)

조희수는 황술조, 손일봉, 김준식, 박봉수의 뒤를 잇는 경주의 작가이다. 선배 작가들의 수려한 환경과 화력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조희수는 그 시대 그 나름대로의 활동으로 한국미술사에서나 경북미술사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고단한 시절에도 화업을 지속해 나간 조희수의 존재는 환경이 어려운 작가들에게 귀감이 됐고, 경북미술의 발전을 위한 기틀 마련에 심혈을 기울인 점은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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