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대표 구상화가 솜털 같은 지역 인문 이야기

장두건

“박양이유? 여기 공덕동이요.”

대백갤러리 근무 시절부터 장두건 선생(이후 장두건)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건네 온 인사말이다. 장두건이 불러주신 나의 이름은 항상 ‘박양’이었다. 아마도 나의 이름을 기억 하실려나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30여 년 간을 장두건을 뵙게 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마포구 공덕동 화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노화가의 모습이었다. 화실 구석구석에 세월을 안고 있었던 물건들과 화백의 심리적인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이 나의 마음에 크게 스캔되어 있다. 2014년 9월, 장두건이 포항시립미술관에 작품과 화구들, 그리고 여러 가지 애장품과 도서 자료 기증을 밝히시면서, 지역 미술 관계자(김갑수, 류영재, 최복룡, 이병우, 박경숙)들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 오후 정리를 모두 끝내고 늦은 점심을 함께 하며 장두건의 삶의 역사를 듣고 난 후, 짧지만 울림이 있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몇 발자국을 걷고 난 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세기를 산 노송이 이승에서 자신의 역할은 다 했노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계셨다. 순간 미묘한 슬픔과 아쉬움이 뒤섞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경이었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대화가는 개인 인생사를 총 정리하는 것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란했으리라.

장두건은 인색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작은 것을 아끼고 절약했다. 지역민들은 장두건이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셨던 화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부족할 것 없는 만석꾼의 아들이라는 소리는 일본 유학 가기 전의 일들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 등 격동기에 가세가 기울면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심리적으로 절약하는 정신이 몸에 배었다.

강변의 가을.포항시립미술관 소장.

2001년 10월 대백갤러리에서 전시를 개최했을 때 기억이 떠오른다. 관람자들에게 팜플렛을 판매했는데, 전시회가 끝난 후 판매 수량과 정확한 금액을 산정하시면서,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나로서는 대화가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고 오해를 했었다. 그러나 이후의 선생의 생활 자세나 예술철학에 있어서 한 치도 헛되이 낭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는 작은 것을 아껴 큰 것으로 베푸는 성품이셨다. 2009년 포항시립미술관 개관에 50여점의 기증과 2014년 18점의 기증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장두건이 고향에 못 다한 사랑을 ‘장두건미술상으로 보여주셨다. 2005년 류영재(당시 포항미술협회장)가 지역미술문화 발전을 위하여 장두건께 ‘장두건미술상’을 제정할 것을 건의 드렸는데, 이에 장두건이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장두건 미술상’이 제정되었다. 장두건은 2010년까지 해마다 100만원을 사재 출현금을 내주시어 ‘장두건미술상’을 빛나게 했고 지역 미술인들에게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데 기여했다.

1986년 최동하 의원 지하에 위치한 문예공간 전시실에서 처음으로 우리 지역에서 장두건 작품전이 열렸다. 1980년대 지역 화단은 불과 20~30명 정도의 미술 인구가 전부이었다. 이 전시는 지역 후배들에게 적절한 파장과 영향을 주었고, 지역 예술가(조희수, 손춘익, 김두호, 이삼우, 박수철, 정대모 등)들과 첫 접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주 왕래가 이루어졌는데, 포항 화단을 모르고 있는 장두건은 박수철(화가)이 중앙상가에 남성복(맨스타)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 포항에 오시면 들러시곤 하여 서울과 포항의 정보를 전하는 장소 역할을 했다. 정대모(서화가)는 큰 파레트에 ‘장두건 서양화 연구실’을 서체로 서각한 현판을 장두건의 작업실 앞에 걸게 되었다. 또한 독학으로 스승도 없이 그림을 막 시작하던 때에 장두건이 한국화 부분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노수(1927~2013)를 소개하여 5년간 사사 받게도 했다.

장두건 작 ‘산’.개인소장

1990년대 중반, 늦여름 저녁으로 기억 된다. 장두건이 류영재, 최복룡을 비롯하여 흥해 초곡 생가에 청년작가회원들을 불러서 만찬을 베푼 적이 있었다. 한옥에 15여명의 청년작가들이 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부채를 들고 하얀 모시 적삼을 입으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그 때의 장두건은 초곡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장손다운 기품으로, 청년작가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앞으로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되겠습니까? 청년작가 한 명의 질문이 있었다. 이에, 장두건은 “재현적인 미술 즉, 그대로 묘사하는 회화는 의미와 생명이 없다. 자기 주관과 개성, 그리고 미술사 흐름에 충분한 사고력이 동반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게 나로서는 크게 들렸다. 또한 2002년 강문길, 이창연(1954~2010), 류영재, 최복룡 등 고향 후배들을 장두건이 회장으로 있는 이형회에 가입시켜 수도권 활동을 하게끔 힘을 보태기도 했다. 2002년 이창연은 이형회 작품상을 받고 난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개인전(2004년, 세종문화회관)을 갖는 등 장두건의 배려가 적지 않은 용기를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봄을 속삭이는 젊은 여인들.포항시립미술관 소장.

장두건은 “나는 밝은 것이 좋아, 어둡고 무거운 것은 싫어. 그래서 나는 설경 작품이 몇 없어, 어릴 적 명절 때 고향 처녀들이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싱그러운 모습에서 환한 기쁨을 주는 것을 느꼈어. 그래서 내 그림에 젊은 여인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밝은 색상이 나의 화풍에 주류를 이루고 있지” 라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장두건은 항상 깔끔하고 멋쟁이 차림을 하셨다. 전시 행사는 물론 화실로 출?퇴근할 때에도 감색 조끼와 양복에 흰 포켓스퀘어를 하신 모습으로 한 치도 구김 없는 신사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식사도 깔끔하고 재료의 본 맛을 즐기는 담백한 맛을 좋아하셨다. 회를 먹을 때 초장과 야채를 곁들이지 않고 간장에 약간 적신 후 회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셨는데, 이는 생선 본연의 맛을 깊이 음미하는 미감을 좋아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화려하고 세련된 선(線)적인 형태의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듯이 선생의 味感과 성품은 심플하고 깔끔한 삶을 추구하셨다.

장두건(화실 마지막 정리하시던 모습 중)

짧은 지면으로 장두건에 대한 솜털 같은 인문적인 스토리를 다 실을 수가 없다. 딱히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는 지역 미술인들과의 인연들은 어쩌면 그가 이루어 놓은 한국미술사의 화려한 화업의 성과보다도 지역민들에게는 훨씬 더 피부에 와 닿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업적에 가려져 묻힌 지역 사람과의 따뜻한 일면들이 많이 알려져, 미래 세대에게 “옛날에 우리 동네 유명한 화가 할아버지(장두건)가 계셨는데…” 라고 시작하는 전설적인 화가의 이야기가 전해져 장두건의 인간적인 사랑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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