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지나치던 도심 속 숨은 보물 천년의 기운 가득

삼랑사 당간지주.

△성건동에 나타난 대문장가, 경흥스님과 김동리

경주 읍성은 동부동과 북부동 일대에 축조된 고려시대 성곽이다. 이 성의 서문이 망미문(望美門), 북문이 공진문(拱辰門)이다. 망미문과 공진문 밖에 있는 마을을 서문 밖, 북문 밖이라거나 서성건, 북성건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성건동(城乾洞)이다. 성의 건방(乾方)에 있다는 말이다. ‘건방(乾方)은 서북방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영장들이 살았다고 영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김동리선생 생가. 삼랑사지에서 100m 정도 떨어졌다.

성건동에는 1300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대문장가가 둘이나 나왔다. 신라시대의 경흥(憬興)스님과 소설가 김동리(1913~1995)다. 경흥은 원효(元曉), 태현(太賢)스님에 이어 신라시대 3대 저술가로 꼽힌다. 저서목록만 40종에 270권에 이른다고 한다.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 등이다. 경흥의 저술은 동아시아와 삼국의 불교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토진종의 비조 친란은 경흥의 저술인 ‘무량수경술문찬’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 논거로 삼았다.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인 웅천주(공주) 사람이지만 신문왕(재위 681~692) 즉위 후 성건동 삼랑사에서 주석했다.

경흥이 떠난 지 1300여 년이 지나 김동리가 태어났다. 삼랑사에서 불과 100여m도 안 되는 성건동 284-2번지다. 김동리는 경주 계남소학교와 대구 계성중, 서울 경신중학교를 다니던 중 17세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23살이 되던 1936년에 단편소설 ‘무녀도’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삼랑사지 옆 소공원에 있는 김동리선생 문학기념비.

삼랑사지 옆 소공원에 ‘김동리선생 문학기념비’가 세워졌다. 강변로를 따라 동국대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절벽 위에 우뚝 선 금장대가 보인다. 금장대가 있는 절벽 아래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며 소용돌이치는 곳이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간다는 예기소다. 소설 ‘무녀도’의 무대다. 무당 모화가 굿을 하면서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나오는 곳이다. 청년 김동리는 집에서 삼랑사지 쪽으로 걸어 나왔을 것이다. 서천변을 따라 걸어서 10분여 거리에 있는 예기소를 오가며 소설을 구상하고 썼을 것이다.

삼랑사지 석재.

△헌강왕이 신하들과 시주를 즐기던 삼랑사

삼랑사지는 중앙시장 앞을 지나는 화랑로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포항 쪽으로 가는 강변로가 만나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 성건동 429번지에 있다. 절은 사라지고 넓은 잔디밭에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절터 옆에 폐업한 식당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사라진 절터를 더욱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다. 삼랑사는 진평왕 19년(597)에 세 사람의 화랑을 기려 세웠다고 하는데 자세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삼랑사와 관련한 사기 기록은 성덕왕 9년 정월에 삼랑사 북쪽에 천구라는 별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경흥스님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헌강왕 9년 꽃 피는 봄에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신하들에게 시를 한 수씩 지으라고 지시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봄 정취 흠씬 묻어나는 강변에서 화전에 시주를 즐길 정도로 경관이 뛰어났고 왕들의 행차가 잦았던 주요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황룡사에 주석하던 정수스님이 삼랑사에서 황룡사로 돌아오면서 추위에 얼어 죽을 뻔한 여인을 구해줘 국사로 책봉됐다는 설화를 남겼다. ‘동경통지’는 삼랑사에 박거물이 찬하고 요극일이 쓴 사적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랑사 당간지주

삼랑사 당간지주는 보물 127호다. 일제강점기 때는 지주 간격이 5m나 떨어져 있고 바깥쪽 면이 마주 보고 섰는데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간격을 좁혔다. 당간지주의 높이는 3.7m인데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치석과 장식 수법을 보인다. 안쪽 면에는 장식이 없으나 바깥쪽 면에는 너비 6~8㎝의 윤곽대를 낮게 돌리고 중앙에는 너비 2㎝의 세로띠로 장식했다. 화려한 수법으로 보아 불국사와 동천동 당간지주 등과 함께 불교미술 성행기인 8c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60년에는 삼랑사비 조각이 나왔다. 길이 7㎝, 너비 6.7의 돌에 정간을 치고 그 안에 해서체로 ‘공(功)’자와 ‘사(事)’를 새겼다. 단국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월성의 동쪽 출입구.

△보살의 지팡이는 일지매의 매화 한 송이

부처나 보살은 현실세계에 나타나 한 수 가르침을 주고 갈 때 그 흔적으로 일지매가 매화 한 송이를 남기듯 지팡이나 신발을 남긴다. 지금 네가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서늘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삼국유사』 ‘경흥우성’조는 경흥 스님과 관련해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당근, 하나는 채찍이다. 문무왕은 죽기 전에 아들 신문왕에게 고명을 남긴다. “경흥법사는 국사(國師)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은 즉위하자 아버지의 고명을 받들어 경흥을 국로(國老)로 책봉하고 삼랑사에 머물게 하였다. 삼랑사가 창건된 지 70년쯤 되던 때이다.

경흥이 아파서 한 달 동안 병석에 누었다. 한 비구니가 나타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화엄경을 언급하면서 ‘웃음치료’를 시술한다. 비구니가 11가지 모양의 얼굴 모양을 짓고 춤을 추니 경흥이 턱이 빠질 정도로 웃었다. 그런 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병이 나았다. 웃음 치료다. 삼랑사에서 300m 북쪽에 있는 남항사 십일면원통상 탱화 앞에 지팡이를 놓고 사라졌다. ‘내가 십일면관음보살이다, 지켜보고 있다’ 따뜻한 격려다.

남항사지로 추정되는 경주노서동 석불입상 비각.

남항사에 대한 기록은 같은 조에 ‘절은 삼랑사 남쪽에 있다’고만 돼 있다. 노서동 석불입상 일대를 남항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시내버스 차고지 한쪽에 있는 불상은 높이 1.1m 폭 0.6m 크기인데 얼굴은 심하게 파손돼 알아볼 수 없고 광배 중 두광은 남아 있으나 신광은 떨어져 나갔다. 『법화영험전』 권하 ‘현비구니신’조에 똑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절 이름을 ‘남항사’가 아닌 ‘남화사’로 기록하고 있다.

노서동석불입상.

문수보살은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 나왔다. 경흥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데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에 먼저 들어가 채비를 하고 잘 생긴 말에 비까번쩍한 말안장, 아름다운 신발에 끈이 늘어졌다. 요란한 행차가 들어서니 길가는 사람이 모두 비켜선다. 그때 초라한 행색을 한 스님이 말린 물고기를 넣은 광주리를 맨 채 하마대에 걸터앉았다. 경흥이 도착하면 말에서 내려디딜 하마대다. 시종이 버럭했다. “너는 승복을 입고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으냐” 스님이 경흥을 향해 비수를 날린다. “두 다리 사이에 살아 있는 고기를 끼는 것보다 등에 흔해 빠진 말린 물고기를 지닌 것이 어찌 혐오스럽다고 하겠는가”

경흥이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쫓아가 보니 남산 문수사의 문수상 앞에 지팡이 놓였다. 말린 물고기는 소나무 껍질이었다. 경흥은 크게 깨달았고 그 후 아름다운 덕행을 남겼다. 해피엔딩이다.

놀라운 일이다. 1300년 전 일이 오늘 일 같다. 스님들의 고급 승용차에 대한 욕망의 관성은 역사가 무척 길고 시비의 역사도 유구하다. 잘생긴 말과 화려한 말 장식, 비까번쩍한 신발이 다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21세기판 문수보살을 기다려본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