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715년, 7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절대군주로 군림하며 온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가 사망하였다. 맏아들과 장손을 먼저 떠나보낸 루이의 뒤를 이어 증손자인 5살의 루이 15세(Louis XV)가 등극하고 섭정 체제가 수립되자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왕권은 급작스럽게 약화되었다. 이렇듯 불안정한 프랑스 내부 사정을 틈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Felipe V)는 프랑스 왕좌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을 보였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에서 빼앗겼던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를 되찾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스페인의 움직임으로 인해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1716년에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와 동맹 조약을 체결, 1720년에 스페인을 무력으로 굴복시킴으로써 힘의 밸런스를 보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장성한 루이 15세 치하의 프랑스가 1731년에 이르러 다시 유럽의 패자(?者)로 부상하자, 영국은 즉시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를 끊고 대륙에서 프랑스를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친구 오스트리아가 패권을 장악하는 것 또한 막고자 했던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참전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5)에서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오스트리아를 돕기를 거부하였고,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벌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토 수복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국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 오스트리아가 1750년대에 들어 프랑스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지자, 영국은 오스트리아와의 원수인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으면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7년 전쟁(1756-1763)을 치루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18세기 내내 동맹 관계를 밥 먹듯 바꾸었던 영국은 비록 ‘배신만 일삼는 잉글랜드 놈들(la perfide Albion)’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온 유럽의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을 통해 국가의 안녕을 도모한다’라는 외교 원칙을 충실히 따른 영국은 19세기를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즉 영국의 세계 질서 주도 시대로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영제국 외교를 주름잡았던 파머스턴(Palmerston) 자작이 남긴 ‘영국에게는 영원한 우방(友邦)도 없고, 영원한 적(敵)도 없고, 오로지 영원한 국익(國益)만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격언은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이 전 지구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한 대제국을 거느릴 수 있었던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지금의 치열하고 무자비한 국제경쟁체제에서 국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하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70년 전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향후 70년도 미국을 선택해야 하냐. 국익이 돼야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70년 동맹을 맺었다고 앞으로도 동맹 맺어야 한다는 것은 모욕이다’라는 주미대사의 최근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틀림이 전혀 없다. 18세기 영국이 그랬듯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 정부는 오로지 ‘국익’이라는 기준만으로 심사숙고하여 동맹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주미대사의 말 그대로 미국과의 동맹이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발언의 진의, 나아가 현 정부의 외교 기조를 ‘국익에 부합하다면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국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지금은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곧 들이닥칠 수 있는 엄중한 시점이다. 우리 정부가 과연 일부의 이익이 아닌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철저하게 정립하는지를 국민들은 불안에 떨며 궁금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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