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천년신라 흥망성쇠 지켜본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간마을 도연언덕에 있는 남간사 석정.

속칭 ‘황리단길’이 몇 년 사이 경주에서 가장 핫한 길이 됐다. 카페와 식당, 술집, 게스트하우스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경주 관광 1번지로 급부상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던 1300여 년 전, ‘7, 8세기의 이 길도 지금처럼 핫한 길이었을 것이다. 황리단길과 어깨를 마주 대고 있는 사정동 경주공고는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가 있던 자리다. 2월 초여드렛날부터 보름까지 열리는 흥륜사 탑돌이는 서라벌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신라인들은 보름달 아래 밤새 탑돌이를 하며 소망을 빌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축제였다. 젊은 남녀들은 짝을 맞춰 사랑을 나누고 젊음을 발산했다. ‘절과 절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잇는 (寺寺星張 塔塔雁行)’ 수도 서라벌에서 7, 8세기의 황리단길 역시 핫플레이스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 전 고대문명을 꽃피웠을 핫플레이스를 ‘황리단길’로 이름하기에는 찬란한 신라의 빛이 너무 초라하다.

황리단길의 공식적인 도로명은 ‘포석로’다. 이 길은 황리단길의 북쪽 시작점인 황남동 ‘내남네거리’를 시작으로 포석정을 지나 내남면 노곡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그러니까 황리단길은, ‘내남사거리’에서 남쪽 끝지점인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이르는 포석로의 일부 구간을 설명하는 별칭이다. 황리단길을 통과해 포석로를 따라 남쪽으로 곧장 나가면 오릉이다. 오릉사거리를 지나 계속 남진하다가 주유소 자리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남산의 서남쪽 들머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곳이 장창골이다.

신라6부촌장의 위폐를 모신 양산재.

장창골(長倉谷)은 해목령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는 큰 개울과 장창지에서 서쪽으로 내려온 계곡물이 일성왕릉 근처에서 합류해 서천으로 들어가는 골짜기다. 골짜기 이름인 장창은 663년 (문무왕 3)이 남산성에 전투 목적으로 지은 3동의 창고다. 동쪽을 우창, 서쪽을 좌창, 가운데를 중창으로 불렀다고 한다. 좌우는 무기창고, 중창은 전투식량 저장고다. 장창골은 신라유적지 중에서도 특별히 성스러운 지역이다. 들머리에 신라의 건국설화가 고스란히 담긴 유적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첫 왕 박혁거세의 탄강설화가 담긴 나정(蘿井)과 신라육부촌장의 영정을 모신 양산재(楊山齋), 6부촌장 중의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 촌장이며 배씨의 시조인 배지타를 모신 경덕사.박혁거세가 정사를 돌보던 신라 최초의 궁궐터 창림사지가 늘어서 있다. 남간사지도 이곳 양산재와 창림사지 사이에 있다.
 

당간지주 옆에 흩어져 있는 초석과 장대석.

△남간사 일념, 이차돈 순교 설화를 짓다.

남간사는 이차돈을 기억하고 추모했던 한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온다.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 촉(月+蜀)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는 것이다. ‘촉’은 ‘염촉’이다. 법흥왕 때 불교진흥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이다. 헌덕왕 9년(817)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매월 5일에 단을 만들어 법회를 개최했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250년이 지난 뒤다. 일념스님의 결사문은 영수선사가 법회를 열 때 썼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은 알려진 바와 같이 이차돈이 순교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그다음 해에는 국통 혜륭과 법주 효원 등이 이차돈의 무덤을 수축하고 비를 세웠는데 이 비석이 ‘백률사 석당’이다. 석당은 일념의 결사문을 바탕으로 재구성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간마을 민가에 있는 남간사 석조.

깊어가는 가을 속의 남간사지는 쓸쓸하다.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당간지주와 남간마을 한쪽에 방치되다 시피 하고 있는 우물이 화려했던 남간사를 추억하고 있을 뿐 들판에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부들이 제 머리의 중력을 견디지 못해 힘겹게 조락의 계절을 견디고 있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와 남간사지로 추정되는 남간마을.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들판 한가운데 마주 보고 서 있다. 지주부의 각 면을 고르게 다듬어 정연한 치석 수법을 보였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단아하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간구와 간공을 만들었는데 간구는 안쪽면 꼭대기에 ‘+’자형으로 시공했다. 특이한 수법으로 평가받는다. 간공은 각 면에 상하 2개를 팠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의 영향을 받아 8세기께에 건립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에 총알자국이 여러개 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 당시 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간지주 옆에는 초석과 팔각대좌 등 석재들이 남아 흩어져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와 총알자국.

남간사는 굉장히 규모가 큰 절이었다. 남간사지 금당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남간마을은 당간지주에서 300여m 이상 떨어져 있다. 이 마을 도연언덕에 남간사 돌우물이 있다. 돌을 짜올리고 그 위에 돌을 다듬어 원형이나 네모날 우물틀을 얹었다. 2매의 판석을 합쳐 한 변이 1.47m 되는 정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가운데 지름 86.5cm의 둥근구멍을 파서 올렸다. 우물돌의 아랫부분은 남아 있으나 윗부분은 시멘트로 복원해 놓았다. 남간사의 흔적은 이 마을 민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998년 실시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종식가옥에는 남간사 장대석 방형초석등 무려 29점의 석재가 건축재로 사용됐으며 손찬익가옥의 경우 우물뚜껑 석재 탑재등이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등 마을 민간 대부분이 남간사 석재를 건축재로 썼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혁거세 설화가 전해오는 나정.

△신라의 히포크라테스, 혜통

『삼국유사』에 남간사 관련 기록이 하나 더 나온다. ‘혜통 항룡’ 조다. 혜통은 남간사의 동쪽마을 은천동에 살았다.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인 일을 계기로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됐다. 당나라에서 지통에게서 총지종을 전수 받아 신라 총지종의 개조이다. 혜통은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의술이 뛰어났다. 당나라 유학시절에 당나라 고종의 딸, 공주의 병을 치료했다. 혜통은 흰 콩과 검은 콩으로 교룡(蛟龍)을 쫓아냈다. 교룡은 혜통을 원망하며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서 사람을 마구 해쳤다. 교룡이 문잉림을 베이스캠프로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문잉림은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주조한 신라의 성소다. 도림사로 추정되는 지금의 구황동모전석탑지 주변이 문잉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잉림은 황룡사 장륙존상을 주조한 곳이다. 인도의 아육왕이 주조에 실패하고,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배에 싣고 전 세계 돌아다녔으나 허사였다. 진흥왕이 이를 주조해 성공했고 주조 장소인 문잉림은 신라의 성소가 됐다.

혜통은 그 소식을 정공이라는 사람에게서 듣고 정공과 함께 귀국해 용을 쫓아냈다. 용은 혜공을 불러들인 정공을 원망하며 기장산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해쳤다. 혜통이 다시 용을 찾아가 살생하지 말라고 타이렀고 용을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교룡이 혜통과 친분이 있는 정공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정공은 신문왕의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효소왕과 불화를 일으켰다. 왕은 정공의 목을 베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었다. 효소왕은 정공과 친한 혜통까지 죽이려 했다. 혜통은 신통술을 써 위기를 모면했다. 효소왕의 공주가 아팠다. 왕이 치료를 부탁했다. 혜통이 주문을 외워 낫게 했다. 혜통은 신문왕의 등창도 낫게 한 바가 있다. 교룡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을 병들게 한 것으로 보아 역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혜통은 역병이 있는 곳이면 추적해 아픈 사람을 낫게 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중국 전국시대의 편작, 조선의 허준이 있다면 신라시대에는 혜통이 있었다. 코로나 19가 일상의 파트너가 됐다. 21세기 지구촌에 빨리 혜통이 나타나 교룡을 박멸해줬으면 싶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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