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필자는 많은 소장품 중 이름부터 독특한 이복 이라는 분의 시화 작품을 가지고 있다. 선친께서 간직한 소품으로 대구의 시인 박훈산의 현대시에 이복이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추상표현으로 묘사한 강렬한 그림이다. 이복이라는 화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산동에 위치한 대건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오래된 중세유럽풍의 미술실 벽면에 걸린 100호 크기의 추상화를 보았다. 화면 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생략하고 무형상의 회색과 갈색이 합하여 대범하게 표현된 덩어리 형태가 무릇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당시에 누가 그린 것이냐고 물으니 몇 년 전까지 미술교사로 재직한 이복 선생의 작품이라고 선배들이 말해주었다.

이복은 1927년 경북 칠곡군 왜관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일본 동경의 구단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제국미술학교인 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사범과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경북공립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왜관 순심중·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대구 남산동에 정착한 후 가톨릭재단의 대건중학교를 거쳐 대건고등학교에서 미술을 지도하였다. 1960년 대 초 재직할 시기에 미술부에서 활동한 학생들 중 현재 원로화가인 최병소를 비롯하여 손수광, 민태일, 김건일, 이광달, 한국화가 이준일 등이 있다.

들리는 얘기로 서문시장에서 상점을 운영하신 최병소 작가의 부친과 내왕이 있어 최병소 작가가 그림을 시작할 때 이복의 조언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복의 그림과 박훈산의 시 ‘전사의 뒤를 쫒아’

역시 1960년 대 중후반에 고교 시절을 보낸 이준일 한국화가는 “이복작가는 나의 스승으로 선생이라 불리우는 미술교사가 아니라 영원한 사표의 작가였다. 과묵하고 가끔 말을 더듬은 특징이 있지만 항상 작가정신을 강조하였다. 공모전이나 인기에 영합하는 상업주의의 물질세계에 머물기를 거부한 스승의 삶과 작업세계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의 작업에 관하여 ‘대구의 근대미술’ 책자에 미술평론가 권원순은 “무겁고 어두운 화면으로 중량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검은 톤이 강조되는 진한 맛을 풍긴다. 명암의 대비나 현란한 색채는 찾아볼 수 없고 단순하게 구획 지워진 수평적인 구도와 어두운 색조, 형태를 단순화시켜 대상을 대담하게 왜곡 변형시킨 검은 획 등의 회화적 특징은 우직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1969년 재직 당시에 신석필, 서창환, 강우문 등과 함께 이상회를 창립하고 활동하였다. 이렇게 열정의 창작활동을 이어갈 무렵 부인이 먼저 병환으로 몸져눕자 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아내의 병 치료에 힘썼다고 민태일 화가는 귀띔해주었다.

교직을 나온 후 다시 특수학교인 야학에 임시교사로 몸을 담고 어려운 일상 속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75년 어느 날 자주 만나는 후배인 정일화가와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만취 상태로 헤어진 후 쓸쓸히 영면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가끔 보게 되는 이복작가의 표현주의 수법의 작품에서는 남다른 힘을 보여준다. 삶에 지치면서도 무엇인가 메시지를 보내는 필선과 내면의 함축된 무한의 이미지를 발산한다. 며칠 전 지역의 화랑대표에게 재조명해야 할 우리지역의 대표화가 중 이복작가를 추천한다고 했다. 언젠가 곳곳에 산재된 그의 작업들을 한 자리에 모아 새로운 한국적 야수파 화가로 표현주의가 중첩된 작업세계가 우리 앞에 선보일 날을 기대하며 희망을 가져본다.

이복의 추상그림과 함께 적힌 시를 적어본다. 박훈산의 시 <전사의 뒤를 쫓아> 앞서간 너를, 여기서, 보노라면, 바로, 내 얼굴, 다음의 내 얼굴아, 잇빨을 악물은, 주검 위에서, 영원처럼, 먼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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